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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너무 많이 가지려고, 너무 많이 오르려고 하지 마라

▲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

△사람이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

 

세상이 눈이 부시게 변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주거 환경일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만 이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쿠퍼는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도시의 미래를 어둡게 보았던 사람은 살루스티우스였다. 〈유구루타 전쟁사〉에서 유구르타 왕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오오, 팔려갈 도시, 살 사람이 나오면 당장 망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릴케 또한 〈말테의 수기〉에서 그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아마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여기서는 모두가 죽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달리 도시는 시대가 변할수록 더 팽창해지고 발달을 거듭하여 현대인들은 “큰 도시는 큰 고독이다.” 라는 말을 실감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골보다 도시에 살기를 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도시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때때로 그 소도시가 가장 고독하고 은밀한 자연 속으로 우리를 몰아버리곤 하는데, 왜냐하면 그 소도시가 언젠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빤히 들여다보이게 될 때가 오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충시키기 위해 대도시로 간다. 그 대도시의 몇 모금만 마셔보면, 우리는 그 술통의 바닥에 남아 있는 것까지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소도시로부터 시작되는 그 순환이 다시금 재개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인들은 살아간다. 현대인은 여타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처럼 안주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지나치리만큼 철저하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 실린 글로 시골에서 소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설파한 글이다.

 

도시가 현대인들의 삶터로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지가 파생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다. 현재의 풍수가들이 말하는바 사람이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가 적당하다고 한다. 즉 땅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아파트 3층까지가 살기가 알맞은 곳이라고 하는데, 20~30층 아파트들 중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층은 10층 이상이라고 한다. 특히 미국의 상류층은 조망권이 좋은 맨 윗 층이라고 한다.

 

인간존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없는 도시와 인간과의 관계를 위스는 1938년에 쓴 논문〈생활양식의 도시성〉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시에서의 접촉은 대면접촉이지만 그 관계는 희박하거나 피상적이며 깊이가 없고 단절적이다. 따라서 도시인들이 대인관계에서 보여주는 체면, 무관심, 짜증 등은 타인들이 개인적 보수성과 표현에 대해 자신들을 적용시키기 위한 반응으로 간주할 수 있다.”

▲ 낙산에서 본 혜화동 일대.

도시는 결코 친화적이지 않고 항상 낯설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보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이사를 간지 수십 년이 지나도 서로 통성명도 없다. 누가 이사를 갔는지 아니면 이사를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은, 아파트 통로에서 만나면 그저 가볍게 목례만 올리는 관계가 전부이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도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사실 문명이 창조한 ‘도시’란 얼마나 위대한 말인가? 한번 그 도시의 구성원이 되면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래서 현재의 군소도시나 농촌에는 사람이 없다. 낮에는 그런대로 사람이 눈에 띄지만 저녁에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간간이 비치는 가로등 불빛과 유령들만이 밤을 지키는 것이다.

 

워드(Babara Ward)는〈인간의 집(Home of Man)〉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도시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은 개개의 도시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계획되기보다는 거대한 망치의 반복적인 두드림에 의해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수준일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기술과 응용력의 망치이며 자국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경제 이득만을 유일하게 갈구하는 두드림이다.”

 

매일같이 논이나 산 위에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길 위에 또 길이 만들어진다. 창조란 이름으로, 편리함이란 이름으로 하나하나 없어지면서 또 다른 것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 역시 역사의 순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것이, 아니 커다란 공룡처럼 그 무엇이 들어선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강원도 산골짜기나 제주도처럼 척박한 곳에 살았던 처녀들이 “좁쌀 서 되도 못 먹고 시집갔다” 는 말이나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 보내라”라는 말은 죽은 말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은 “딸도 보내라”는 말까지 덧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은 매정한 놈이야 돈은 어수룩하지 않아 돈에겐 더 많은 돈 이외엔 친구가 없어”라고 존 스타인벡이〈분노의 포도〉에서 얘기한 것처럼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 필요한 사회가 되어서 신년 덕담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부끄럽지가 않다. 아니 받으면 더 기쁜(?) 인사말이 되었다.

 

“돈도, 지혜도, 진실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다.” 라는 이탈리아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모두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라는 옛 속담을 비웃듯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돈을 횡령하는 방법도 고도로 발달되어 숫제 국제범죄 조직들이 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채소장사들이 써먹던 차떼기 방법을 모방하지 않나, 문화인답게 책처럼 포장해서 건네지 않나, 그러면서도 반성은커녕 서로 ‘네 탓’만 하고 있다

▲ 순창 평남리 부근의 섬진강.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은 교육여건이 좋은 곳, 좋은 학원이 있는 곳,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대형백화점과 전망이 좋은 곳이 살만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 8학군이 있는 강남일대와 분당구 일대의 땅값이 제일 비싸다. 그런 연유로 그곳에 있는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나 땅을 사두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강남이 꼭 좋은 곳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수학회(理數學會)의 고문인 수강(秀崗) 유종근(柳鍾根)선생은 “강남 지역은 부는 얻을 수 있는 지역이지만 사대부가 살만한 곳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갖 잡탕으로 뒤섞인 강남 지역은 이미 순수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란다. 문명이 발달 할수록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에머슨은 다음과 같이 질타하고 있다.

 

“문명의 참된 기준은 통계조사, 즉 도시의 크기나 작물의 수확량 같은 것이 아니다. 문명의 참된 기술은 그 나라가 어떤 인간을 양성해 내고 있는가이다.”

 

습관이 오래되면 품성으로 굳어지는 법이다. 반성이 없이 새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혈구지도라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곧 나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 우리들의 고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중국 악양루에는 중국 북송 때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에 나오는 글이 걸려 있다.

 

“천하(天下)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긴다.(後天下之樂而樂)”

 

또한 “천하를 생각하는 사람은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는다.” 라는 옛 말이 있다. 니체도 그와 비슷한 글을 남겼다. “가까운 곳에 대핸 사랑보다 더 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렇다 그러한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고도 넓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먼저 먹기는 곶감이 달고 양잿물도 큰 것을 먹고 “내 가족과 나만 무사하다면 세상이 다 타버려도 좋다”는 루이 14세의 애인의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개인의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만 있지 천하의 일을 먼저 근심하는 국가나 단체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세계차원의 대동의 이익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가난을 절실하게 체험했던 시절은 가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 어찌된 일인지 ‘절대적 빈곤’은 없다고 하면서도 절대적 빈곤은 끊이지 않고 ‘상대적 빈곤’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은행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만큼 돈에 대한 갈망도 크게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의 종교는 돈이라고 할 수 있다. 150만원 월급쟁이가 10년 안에 ‘10억 모으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뿐인가? 서울의 모 여자대학에서는 ‘부자학 개론’이 인기 폭발이고, 강남의 잘 나가는 사모님들이 ‘실전재테크’를 강의하기도 한단다.

 

“물질 가는데 마음도 간다.” 우리나라의 옛 속담이 있다. “네 눈이 미치는 곳에 네 보물도 있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당한 말씀들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설정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위해 간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이 제일 숭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어떠한 종교보다도 더 강력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은 대다수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3대 가난 없고 3대 부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부나 가난이나 영원한 것은 아니고 사람의 노력이나 또는 자연의 순환법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나타낸 말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부자들의 재산이 여기저기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망해도 남은 재산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호남지방에서는 땅 부자들의 흥망성쇠를 두고 ‘권불십년(權不十年) 재불백년(財不百年)’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자가 3대를 간다는 것은 백 여 년을 간다는 것이고 권력은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재력은 십년이 못가고 권력은 일 년은커녕 몇 개월도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내 노라 하는 큰 그룹들은 나라가 망하거나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천 년 만년을 이어갈 재불유한(財不有限)이라 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가고 부와 권력도 세습되지만 가난 역시 세습되고 있다는 말이 정설이기도 하다.

 

적소(謫所)인 제주도에 있던 추사 김정희는 변함이 없이 그를 따르는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고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상의 도도히 흘러감은 오로지 권리(이것만을 붙좇아 이를 위해 마음을 태우고 애를 쏟는다. 이 같은데도 그대는 권세와 이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바다 밖 초췌하고 파리한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욕을 향하듯 하는구나, 사마천은 말하기를, ‘권리로 합쳐진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진다.’고 하였거늘,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리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남이 있으니 권리를 가지고 나를 보지 않은 것인가?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주자 역시 “사람이 이(利) 만을 추구하면 이(利)도 얻지 못할 뿐 이니라 또한 장차 그 몸을 해치고 의(義)를 추구하면 이利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 진다”고 하였다.

 

권력이 무엇이고, 재산이 또한 무엇인지를 추사와 주자의 말에서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오래 된 미래“와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사라진 뒤 그 시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몰라보게 변한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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