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그런 장소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노송동 안기부 분실 지하실이 그곳이다.
그 밀실에서 나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그 사람은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나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차렸고, 얼굴만 보아도 지식인 타입이었다.
“신정일씨는 어떤 시인들을 좋아하시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데,
“미당 서정주 시인은 우리말을 가지고 시를 너무 잘 쓰기 때문에 존경합니다. 신정일씨는 어떻소? 나는 김승옥씨의 소설도 좋아하오. 당신은 조사해보니까 김지하,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데, 어떻소?”
하고 말끝을 흐르는 그에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고 의자에 시체처럼 누워 있을 뿐이다.
지금 내게 서정주는 무슨 의미고, 김승옥이나 김지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다시 살아나갈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나의 생각이나 표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 사람은 시와 소설을 이야기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문학도였나? 글은 안 써지고, 그러다 이곳에 밥벌이를 위해 취직한 건가? 그런 상황에도 나는 그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실은 냉혹하기만 한데…….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에게 자꾸 간첩이라고, 북한을 얼마나 여러 번 갔고, 돈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고 다그침을 당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정말로 북한에 갔었고 그들로부터 지령과 함께 돈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신을 만나기를 열망하다가 정말로 신을 만나게 되었다는 종교인들의 말과 같이,
아닌데, 내가 제주도에서 줄곧 했던 일은 온 몸이 바스라지게 혹사하며 행했던 노동과 책읽기, 그리고 어설픈 습작밖에 더 있었던가?
그러나 그가 나가고 다시 취조관이 바뀌자 나는 또 그 무시무시한 간첩혐의자가 되어 그들에게 무자비한 취조와 함께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애애초 그 믿음과는 관계없이 내가 얽혀 들어갔고, 그 믿을 것도 없는 나를 중심으로 하나의 범죄 집단(간첩단)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증거도 가능하지 않다.” 미국 경제학자인 스튜어트 체이스(Stuart Chase)의 말은 너무나 지당하다.
그런데 굳이 부정하는 내 말을 그들이 믿을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두들겨 맞다가 기절을 하면 물을 끼얹으며 취조를 받는 것은 감당할만했다. 그런데, 진실로 괴로운 것은 가끔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였다. 숨이 넘어갈듯,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듯, 가냘프게, ‘아, 아악, 어머니, 어머니’ 하고 되뇌는 비명소리,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몇 사람씩 들리는 그 소리,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마치 내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는 듯, 그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살점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눈이 부신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취조와 구타를 당하다 보니 며칠이 지났는지 분명하지 않은 어느 날,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한가한 날, 세상에 정적만 감도는 것 같은 시간.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있는 그곳이 잠깐 생각이 아니 않다가 문득 내 위치를 깨달았다. 그때의 암담함과 참담함,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지, 나는 과연 다시 이 지하실에서 나아가 푸른 하늘과, 해와 별, 그리고 흐르는 흰 구름과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자유롭다는 사실까지도 잊은 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 순간 누군가 불쑥 문을 열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취조관이었다.
“커피를 드시겠소?”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그가 가져 다 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두려운 눈으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 선생?” 하고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웃음을 짓더니, 다음과 같이 내게 말했다.
“이제야 조사가 끝났소, 자술서만 쓰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자술서를 써야 하는데, 당신이 나보다 글을 잘 쓸 테지만 자술서 양식에 맞게 써야 하니까, 당신이 태어나서 살아온 그대로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구술하시오, 어린 시절 아팠던 것이나 누군가를 짝 사랑 했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것까지도 다 말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소.”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일생의 중요한 어느 시기나 말년에 이르지 않고서는 자기의 살아온 삶을 속속들이 뒤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전체의 삶을 반추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그날 그때까지 살아온 생애를 다 돌아보며 내 입으로 아주 기이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내가 살아온 과거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가끔씩 피곤하면 내게 웃음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커피를 마시겠소?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겠소.”
그는 그 사이 담배를 두어 갑은 피웠을 것이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나는 살아온 내력을 다 토해냈고, 그는 내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곧 속기로 적었다. 푸르던 젊음의 시절 찬란하게 빛나야 할 그 이십대 중반에 나는 생각만 해도 기이한 자서전을 입으로 구술했던 것이다. 구술이 끝나자 그는 말했다.
“다시 자술서를 쓰는데, 내가 부르는 대로 쓰시오.”
나는 그가 부르는 대로 자술서를 썼다. 세상에 나와서 책을 읽고 중부전선인 철원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제주도에서 노동을 한 것 밖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나의 자서전을 나하고 전혀 안면이 없는 한 사내가 국가에서 월급을 받으며 써 주고 있었다.
에드워드 올비는 〈아기에 관한 연극〉에서 상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상처라는 깨어진 가슴이 없다면 어떻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당신에게 깨어진 가슴이 없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 내게 그런 이상하고도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지난날을 샅샅이 되돌아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야릇한 〈자서전〉이 완성되었다. 자서전을 들고서 그는 내게 말했다.
“이 글은 〈영구 보존함〉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시 다짐을 했다.
“여기에 왔던 일, 여기 와서 겪었던 일을 죽는 날까지 누구에게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와서 겪었던 것은 당신의 가슴속에만 있어야 하오. 하여간 수고했소. 언젠가 이곳에 왔던 것을 영광의 한 시절이라고 여길 날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들어갈 때 벗어놓았던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만인가, 내가 마치 은빛 모래사장이 빛나는 해변의 나체촌에서처럼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내다가 다시 옷을 입다니…….
옷을 입는데 돌연 눈물이 났다. 입술을 질끈 질끈 씹으며 나는 울었다. 나는 울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위독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나를 기다렸을까? 매일 저녁 통학차로 가면 힘도 없이 나를 맞던 아버님, 그리고 어머니는? 또한 가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일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 TV에서 한수산의 필화 사건에 휘말린 박정만 시인의 고문을 본 적이 있다. 어찌 그리도 내가 겪었던 상황과 흡사한지, 김대중에게 돈을 얼마나 받았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얼마나 여러 번 만났는지, 그리고 이어지던 고문. 그들은 말 그대로 기계와 같았다. 가책은 커녕 오히려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탔다. 그래서 클레오메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 때에는 적에게 아무리 나쁜 일을 해도 정의 개념 밖의 일이며, 신들에 대해서나 인간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점찍은 사람들을 그처럼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했을 것이다. 나처럼 그곳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간첩이 되거나 정신이 이상이 되어 폐인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 번 그 지하실로 들어가면 들어가기 전의 정신을 가지고 나오기는 어려운 곳이 그곳이었던 악명 높은 안기부 지하실이었다.
그리고 여럿이라면 공동체 운명이라고 여겨서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지만 불행스럽게도 혼자였다. 더구나 여러 사람의 감시 속에서 혼자만 벌거벗은 채, 잠을 못자고 짐승처럼 여러 사람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으면서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는 속에서 보낸 며칠이었으니, 마치 랭보의 시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그곳과 같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 이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곳으로 끌려오던 것처럼 수건으로 내 얼굴은 가려 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다시 시멘트 길을 걸어가서 차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를 차가 달렸을까?
모르긴 몰라도 내가 처음 이곳으로 오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갔을 것이다.
“다 왔습니다, 내리십시오.”
그들은 나를 내려준 뒤 차에 오르며 “우리가 간 한 참 뒤에 수건을 풀면 됩니다.”
차는 곧바로 떠났고 그들의 말을 좇아서 잠시 후 수건을 풀자 낯익은 풍경, 바로 가게 앞이었다. 글쎄, 그들은 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 내가 긴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그 날 그들에게 끌려가던 새벽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가 긴 꿈이었거나 아니면 환상은 아니었을까?
나는 내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내 던져진 느낌이었다.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운 밤인가, 새벽인가 모를 거리에 바람은 차갑게 불어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하실로 내려가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섰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길,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지금이 몇 시지?”
내가 끌려갔던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뒤인 1981년 여름 풍경이었다.
그 때 기이한 자술서를 썼던 그 순간을 한 편의 시로 쓴 것은 약 5년이라는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 뒤였다.
1984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상황을 〈그 때 그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로 남겼던 적이 있다.
“그는 여섯 사람 중에 나에게 유일하게 친절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밖이 안 보이는 낯선 지하실 방
하나의 소지품도 없이
팬티마저도 걸치지 않은 이상한 차림의 나에게
팔월의 성하(盛夏)가 무색하도록
오싹 한기를 느끼며 얼어있던 나에게,
둘만 있을 때에는 담배도 권하고
자기는 문학에 뜻을 두었었다며
근간의 소설(小說)과 시(詩)의 경향을 얘기도 했다.
넥타이 단정히 맨 그는
잠바 차림의 그의 동료들이
나를 데리고 놀(?)때는
고개 숙이고 담배를 피우다가
그들이 사라지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깍듯이 공손했고,
뺨은커녕 욕 한마디 선물하지 않았는데,
단 마지막 자술서를 쓸 때
“다른 글은 당신이 잘 쓰실 테지만
이것만은 내가 부르는 대로 쓰시오” 하였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부르는 대로 썼고 마지막에
“힘들었지요, 이곳에 왔던 것이 어쩌면 영광이라고 느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세월 흘러 시내를 걸어 가다가
눈 안에 선뜻 안기던 사람
허리 굽혀 인사 나누었는데,
‘누구였더라.’ 뒷모습 봐도 모르겠더니,
열 걸음 쯤 걸어 고려당제과점(현 대한문고) 앞을 지날 때
진열된 빵을 보니 배고픔처럼 떠오르던
그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 같이 보였던
그때 그 사람. ( 1985. 5월 31일)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나지 않다가 열 걸음쯤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역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옛 사람이 말한 너무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게 되면 ‘가인(佳人)과 헤어지는 것과 같아 열 걸음을 걸어가다가 아홉 번을 뒤돌아본다.’ 는 말이 있지만, 어떻게 열 걸음쯤 걸어가다가 생각이 났는지, 그래서 다시 손을 흔들며 제 갈 길을 가던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던 그 때 그 순간.
그 당시의 혼돈스럽던 내 마음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역시 그 때처럼 내 마음은 혼돈 속에서 깨고 혼돈 속에 잠이 든다. 그렇다. 삼십 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 해는 뜨고 지고, 꽃도 피고 진다. 이렇게 저렇게 가는 세월.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