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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적 갑'은 없다

▲ 전선기 전 기아특수강 대표이사

요즘 우리 사회에 갑과 을의 관계, 이른바 갑질논란이 뜨겁다. 인간은 서로 어우러져 관계를 맺으며, 어찌보면 상호 의존 속에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체들이다. 부자관계, 사제관계, 친구관계, 거래관계 등 모두 상대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상호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를 일러 독일의 법학자 Otto von gierke는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다”라 설명한 바 있으며, 오늘날 교육의 지향점도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인류가 오랜 집단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힘의 우열이 발생하고, 상황에 따라 갑이라는 우월적 위치와 아쉬운 을의 입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신분 또는 경제력에 의한 것과 개인 또는 집단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 보편화되고 민주주의가 발전·확산되면서 갑을의 관계는 고정되어있을 수 없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어서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갑을 관계는 바뀔 수 있다

 

먼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이 갑이고 여성은 을이라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요즈음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일고 있는 여러 상황에서 이러한 통념이 급속히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젊은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에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TV나 드라마를 보고있으면 다음 세대에는 완전한 남녀평등이 실현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상황변화에 따른 예로, 흔히들 선출직 의원이나 공직자들의 갑질 논란을 종종 접하게 되지만, 이들이 선거때만 되면 대중들에게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로 변하는 을의 행태를 목격하기도 한다.

 

몇 년전 모 경제학자가 저술한「나쁜 사마리아인(Bad Samaritans)」이라는 책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줄거리는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앞세운 선진국들이 후발국들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으니 후발국들은 여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선진국들도 그들의 시장확보를 위해 후발국들의 구매력을 높여야 하기에, 개발원조 또는 투자를 앞다퉈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갑을 관계의 변동성을 기업경영의 현실에서 살펴보자. 자동차를 생산·판매하는 A회사는 1000여개의 협력업체로부터 2만개의 부품을 납품받아 수만명의 종업원들이 자동차를 조립해 수백만명의 소비자들에게 판매한다. 따라서 A회사의 경영자는 수많은 협력업체, 종업원 그리고 소비자들과 상호관계를 맺고 거대한 조직생명체(going concern)를 이끌어가는 CEO이다. 여기서 과연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일반적으로 A회사의 경영자는 갑이고 다른 관계인들이 을이라 인식하고(특히 대기업의 경우), 위의 관계인들도 그러한 통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자. 그는 1000여개의 협력업체중 어느 한 곳에서 납품이 지연되거나 불량품이 섞여오면(혹은 몽니를 부리면), 조립라인 전체가 중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경영자는 초조한 을이 된다. 또 요즘 같이 노조의 힘이 강력한 상황에서는 종업원들의 집단 태업이나 파업이 회사를 사실상 마비시킬 수도 있으며, 소비자들의 집단 크레임이 회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 경영자는 종업원들의 동향이나 소비자들의 불만상황에 대하여 항상 노심초사하며 긴장을 놓을 수 없다. 틀림없는 을의 자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여기에 누가 ‘항상적 갑’이고 누가 ‘항상적 을’이란 말인가? 이렇듯 갑을의 관계는 시대와 상황, 또는 처한 입장에 따라 언제나 바뀔 수 있으며 ‘항상적 갑’은 없다고 봄이 옳지 않은가?

 

상생사고로 의식전환 요구

 

권력투쟁을 비롯한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금언은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력 정치지도자들이 모든 거래관계의 공정경쟁과 갑질억제의 담론을 펴는 것은 모두 이러한 원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나 현재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머릿속에서 갑을의 관념을 버리고 상생사고로의 의식전환이 요구된다.

 

현실에서도 ‘항상적 갑’이 있다. 바로 성경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의 예이다. 예수님 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사연 때문에 항상 멸시와 천대속에서 살아가는 ‘항상적 을’이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은 노상강도에게 상처받고 신음하는 환자를 구해줌으로써 일거에 ‘항상적 갑’으로 변화한다. 오늘도 화재속에서 이웃을 구출하는 등 의인들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 곁에도 ‘항상적 갑’은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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