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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가 조선의 4대 길지(吉地)

경기전 조경묘 오목대 / 전주는 조선조의 본향 / 옛 명성을 되찾았으면

▲ 전일환 전 전주대 부총장

영조 33년(1757) 홍양한의 <여지도서> 에 ‘덕진연지(德津蓮池)는 덕진지(德眞池)라고도 하는데 전주관아 북쪽 10리에 있다’라면서 ‘고을 땅의 형세가 서북쪽 방향이 텅 비어 전주(全州)의 땅기운이 새어나간다. 고로 서쪽 가련산(可連山)으로부터 동쪽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새어나가는 땅기운을 멈췄다’라 했다. 건지산은 마이산으로부터 와 전주부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부의 남쪽 3리에 곤지산(坤止山), 안산(案山)으로 부의 남쪽 3리에 완산(完山)이 있는데, 모두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 속에 ‘전주에는 중자산(中子山)이란 크고 웅장한 산이 있는데 부의 남쪽 남천너머 나지막한 완산의 이름을 따서 전주의 지명을 삼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본디 백제 완산은 비사벌(比斯伐), 비자화(比自火), 온다라, 온드르라 했고, 신라 진흥왕 16년(555)에 완산주, 경덕왕 15년(756)에 지금의 전주로 바꾸어 9주(州)를 두었다.

 

덕진지는 그 모양이 연꽃형상이고 건지산은 연잎모양이어서 석물이 있으면 물속에 가라앉음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조 신라 사공(司空)공 이한(李翰)의 묘소가 있는 조경단에는 돌비나 상석 등이 일체 없다. 본디 전주는 태조의 본관향임으로 전라감영터를 정할 때 명나라로부터 두 번씩이나 퇴를 당하였지만, 가련산(可連山)을 그려 보내고서야 인정을 받았다는 설화가 고려대 나옹(懶翁)과 무학이 남긴 <금감록(金鑑錄)> , 혹은 <삼이록(三移錄)> 의 비기( 記)에 전해온다. 전주는 개성, 평양, 한양과 더불어 조선의 4대길지로 손꼽았다.

 

특히 덕진연못의 연꽃은 조선건국이념인 유교의 성리철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의 태두 주돈이(1017-1073년)가 여산 연화봉(蓮花峰) 아래 염계(濂溪)에서 남긴 <애련설(愛蓮說)> 이 그것이다. ‘진나라 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이래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하였다. 나는 유독 진흙 속에서도 더러워지지 않고, 요염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오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좋아한다’는 연꽃설이 고산의 <오우가> 중 대나무의 속성을 노래한 것과 같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킨 거며 속은 어찌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라는 무욕(無慾)과 정직(正直), 불변(不變)의 선비적 고결(高潔)성이 짙게 풍겨난다.

 

태종 11년(1410)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의 어진전(御眞殿)을 세웠는데, 세종 때 경기전이라 개칭하였다. 영조 때 건지산 조경단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사공공 이한(李翰), 동비 경주김씨 위패를 모셨고, 고종조에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란 고종의 친필석비를 세웠다. 발산에 목조 이안사의 유허비, 오목대에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남겨 전주가 조선조의 본향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완전한 땅, 우리 전주가 조선 4대 길지(吉地)라는 옛 명성을 되찾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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