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와 문화 다양성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 건강한 자기애에 기초해
지금도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더 박서(the boxer)’를 들으면, 노랫말 속의 주인공이 추운 도시 뉴욕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러나 결코 갈 수 없는 그 정서와 현실에 공감한다. 뉴욕이라는 미국 동부도시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주는 물리적인 추위 뿐 아니라 지극히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청년이 자본주의 첨단 도시에서 자본과 후원자 없이 견디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추위가 느껴지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이다. 듣는 청자인 나도 불쑥 고향의 이미지가 있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이다.
보편적인 정서는 표현하는 언어나 표현 방식은 달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에 우리는 보편적 정서에 기초한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 가치도 추구한다. 다만 인류애를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싶은 가치라기보다는 슈바이처나 한비야와 같은 그 누군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타인을 평가할 때 적용하는 잣대 가치로 여겨 오히려 우리들 서로에게 추위를 더 가하고 마는 선언적 가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인류애보다는 자기애가 일방적으로 앞서고, 문화다양성보다는 자문화애의 무의식적이고 편향적인 집착이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증진을 막는 것은 아닐까.
인류애나 문화다양성 증진을 자기 지역과 자기 일터와 자기 가정에서 실천하려면 성인이 되는 과정의 성장의 역사 속에서 이미 굳어져 버린 자기 습관과 다른 새로운 문화와 보편적 가치와 요청에 직면할 때 느껴지는 어색하고 쑥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 물론 때로는 자기애마저도 자기를 제대로 돌보는 정서인가 점검해보아야 한다. 즉 자기 스스로 타인이나 타문화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자기 정서를 끊임없이 상처내면서 그 문화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왜곡된 자기애는 없는지, 자기애의 내용과 방식을 복기해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자기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표현해야 할 자기의 정서를 오히려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반면 타문화를 동경한 나머지 우리 문화를 상대적으로 경시 하거나, 또는 반대로 타문화를 무조건 사대주의적 문화 혹은 저질문화로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 초기 문화생활에는 미국 하이틴 소설 번역본이나 미국의 대중음악이 일정부분 역할을 했고, 현대사 이전의 문화생활은 일제 강점기의 강요된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영향을 입었으며, 조부모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문을 기반으로 한 중국문화와 질서에 기초하여 문화생활을 영위했다. 우리는 이렇듯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타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문화혼성적 문화퇴적층을 형성해왔다. 어느 나라도, 어느 지역도 예외가 없다. 문화는 그렇게 타문화와 접촉하고 영향을 입고 입히며, 형성되고 사라진다. 그래서 타문화의 부정적 영향은 제거하고 긍정적 영향만을 소화해 내려는 노력도 끝없이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문화다양성의 출발은 건강한 자기애에 기초한다. 자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 즉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정서가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지도 관찰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를 분명히 찾아 바로잡을 때,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열린 접촉이 가능해지고, 비로소 가식적인 인류애가 아닌 진정한 인류애의 동참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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