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왕에게 보낼 만큼 자랑스러운 특산품이 있었다. 그 지방의 땅과 기후에 가장 잘 적응해서 어느 지역의 것보다 우월한 산품이 그것이었다. 토질과 기후에 사람의 심성까지 들여지면 그것은 진상품이 되었다. 진상품은 고을 원님들의 무리한 아부경쟁으로 백성들의 원한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고을들의 브랜드를 키워내는 역할도 했다.
진상품은 그러한 외형적인 문화 외에도 내면의 속살을 가졌다. 그것은임금이 고을수령의 봉임 자세와 백성들의 형편을 알아보는 직접적인 소통의 도구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왕이 지방고을 수령들의 봉임 자세를 깊고 세세하게 알아보는 방법은 별로 많지 않았다. 요즈음 같이 민원전달 시스템이 구축되지도 않았으니 지방의 수령들은 아방궁의 주인이었다. 간혹 암행어사 같은 제도를 활용하거나 상급기관의 감찰활동도 있었으나 너 좋고 나 좋은 일로 무마되기 일쑤였으니 지방 고을 수령들의 큰 통제수단은 스스로 수양된 선비정신이었다.
임금은 고을 수령들의 봉임 자세와 백성들의 형편을 알아보는 소통의 방법을 고민했고 그것의 방법은 각자의 고을들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의 실체를 점검해 보는 것이었다.
진상품은 왕실로 보내진 고을의 특산품이었다. 그러나 진상품의 실상은 왕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가장 잘 만들거나 가꾸거나 채취할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그랬다.
한양의 임금에게 올라간 진상품은 그 품질과 크기와 상품성이 해마다 기억되고 기록되었다. 흉년이 들었는데도 예년과 같은 좋은 진상품이 올라왔다면 그 고을 원님은 백성들에게도 좋은 상품을 기준으로 평년과 같이 조세를 과하게 부과징수 하고 있는지 점검했다. 그러나 흉년의 진상품이 흉년 수준이었다면 그 고을 원님은 아부적 충성이 아니라 정직한 것이니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선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고을들에서 한양으로 올리는 진상품은 백성과 임금의 소통도구인 셈이었고 그것을 통하여 수령의 봉임 자세와 백성들의 형편을 점검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임금에게 올리는 고을들의 먹는 진상품을 관리하는 곳은 공상청이었다. 조선팔도의 고을들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의 고을 형편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소리꾼들이었다. 조선팔도를 유랑하며 고을들의 민심과 백성들의 형편과 산품들의 풍, 흉을 잘 알던 소리꾼들을 한양의 공상청에서 불러 조선팔도 고을들의 산품에 대한 형편을 점검하기도 했다.
동편제 판소리 창시자 가왕 송흥록은 경상도와 함경도까지 생의 흔적이 많은 명창이다. 그가 한양의 고관들과 인연을 많이 가지게 되었던 첫 번째 사연은 왕실 공상청의 부름으로 조선팔도 고을들의 진상품에 대한 실상을 제공해 주는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송흥록 명창은 조선최고의 명창이 되면서 활동영역이 조선팔도로 커졌다. 그러한 연유로 수많은 고을들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이 그 일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에 참여했던 또 다른 집단은 보부상들이었다. 전라도 보부상은 전라도 진상품을, 경상도 보부상은 경상도 진상품을 그러한 방법으로 조선팔도 고을들의 진상품은 백성들의 사정과 수령들의 백성 섬김 자세를 확인해 내는 도구이기도 했다.
진상품의 속살은 존재로 선행인 고을백성들의 형편을 제대로 살펴보고 고을 수령들의 봉임 자세를 묵시적으로 감시해내는 문화적 통치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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