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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모름지기 역사를 움직여온 존재들은 침묵하는 다수였다. 혁명가도 정치가도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침묵하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한때 백성이었고 또 어느 때는 민중(people)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는 대중(mass)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이른바 정치가, 혁명가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이 오면 오랜 침묵을 깨고 저자에 나서서 세상을 뒤엎는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들은 대체로 선거를 통해서 세상을 응징하거나 보상한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종종 기대와 예상을 비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침묵하는 다수는 무섭다.

미디어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온갖 수단들을 동원해서 중구난방 외치고 주장한다. 그렇다. 이제 저 많은 입들을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게 민주주의의 위대한 열매이기도 하다.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세상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 얼마나 오랜 고통의 열매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침묵하는 다수들의 존재를 종종 잊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이 세상엔 침묵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친일파도 독립군도 아니었던 이들, 좌도 우도 아니었던 이들, 한 번도 ‘친*’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 이들이 특징은 기다림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들은 순간순간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하는 길이 그것뿐이라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들의 침묵을 본능적 보신에만 급급한 비겁한 선택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고도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친일파는 척결되어야 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는 예우 받아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을 일으키고 양민을 학살하는 자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는 함께 분노하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돈의 논리로 희생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연민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쉽게 외치지 않는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침묵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방기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숱하게 목도해왔다. 거의 우리 땅에서만 가능했던 여러 차례의 무혈 혁명, 때로 거리를 메우며 흘러넘치던 거대한 환희, 애도, 분노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드러낸 저들의 외침을 기억한다. 침묵하는 다수의 힘은 그런 것이다.

어떤 정치가의 허망한 자살을 두고 칼날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세상엔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침묵이 방조이거나 무관심으로 보이는가? 그의 삶에 경의를 보내면서도 공공의 장례에는 반대한 이들, 잘못 된 문화, 약자를 보호하지 못 하는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언사로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의 침묵까지를 싸잡아서 또 다른 가해라며 몰아붙이는 이의 표정에서 깊은 절망을 느낀다. 진영을 넘나들며 세상 모든 사안의 판관을 자처하는 철지난 논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설익은 생각, 절제되지 않는 논리로 세상을 현혹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 그대들 말의 날(刃)이 점점 날카로워질수록 세상의 침묵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침묵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곽병창 교수는 극단 창작극회·창작소극장 대표,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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