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창 우석대 교수
 
   마스크를 쓰고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여민 학생들이 캠퍼스를 오고간다. 대면수업을 시작한 뒤 한 달여가 지났지만 20학번의 얼굴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제는 마스크 쓴 모습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오죽하면 마스크를 벗고 나면 더 못 알아볼 거라는 씁쓸한 농담도 건넨다. 상담을 하러 찾아온 학생도 먼 거리에 앉게 하고 창문, 출입문을 다 열어 둔 채 이야기를 나눈다. 날씨가 추워져 롱 패딩까지 갖춰 입고 나니 이제 캠퍼스는 흡사 외계인들의 나라처럼 낯설다.
실시간 화상 강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인터넷 서비스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작은 화면 안에서 조그마한 방을 나누어 가진 학생들이 제각기 편안한 차림으로 모니터에 들고나는 게 오래된 일상이었던 것 같다. 실시간으로 채팅창을 통해 질문을 하고 창작실기와 토론을 진행하니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의견들도 제법 많다. 만약, 아주 장기적으로 이게 더 편안해지면, 이 방식이 더 자연스러워지면 학교는, 대학은 어디로 갈까? 캠퍼스를 팔아서 아파트나? 편안하려다가 섬뜩해진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육에 대한 백가쟁명, 난상토론이 이어진다. 전통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주던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격변을 맞이하는 환경에서 취업률 일변도의 대학평가는 과연 지속가능한 해답을 제공해줄까? 창의력과 융통성을 길러주는 예술교육을 지금처럼 도외시하는 대학 교육에도 더 근본적이고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와 우려, 생산적 전망과 허탈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 해가 저문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의 본질은 캠퍼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마주하는 공간에 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를 익명의 골방에서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낸 시기로 간주한다면, 대학은 광장으로 나온 개인들이 서로의 자아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특히),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의 삶에 눈과 귀를 열고 낯선 것들과 공존하고 소통하는 경험을 제대로 하게 된다. 그 점이 대학이 오랫동안 해온 일이자 놓칠 수 없는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교수는 더 이상 학생들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지식전달자가 아니다. 학생들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서 더 빠르고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얻어낼 수 있다. 취업을 잘 하기 위해서라면 대학보다 오히려 노량진의 학원이나 ‘인강’을 찾는 게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길이다. 대학이, 학교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현장에서 만나는 그 구성원들에게 있다. 교육은 강의실에서 교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논어(論語)에서는 ‘셋이 걸어가면 반드시 그 안에 스승이 있다’고도 했다. 삶의 오솔길을 함께 걷는 이들 모두가 스승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서 궁극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의 걸음걸이, 표정, 말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그 사람의 삶 전체이다. 어떤 이의 진면목(眞面目)을 안다는 건 그래서 엄숙한 일이다.
한 때 눈빛만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우리는 상대의 웃는 입술과 하얀 이빨, 가볍게 씰룩이는 보조개에서도 우주를 배운다. 그렇게 그의 입김과 한숨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눈빛만으로 송년이라니, 내년에는 이러지 말기를, 학교는 다시, 제대로 열려야 한다. /곽병창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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