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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문루에 활을 걸고…

조상진 객원논설위원

조상진 객원논설위원
조상진 객원논설위원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平壤門樓)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浿江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

이는 927년 12월, 후백제 견훤왕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친 직후에 고려 왕건에게 보낸 서신에 나오는 글귀다. 이 얼마나 심장을 뛰게 하는 말인가. 고구려 멸망으로 만주 일대를 잃은 이후, 가장 호쾌한 영웅의 포부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남북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통일의 의지를 묵직하게 묻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 1100년 전 후백제를 건국하며 전주를 왕도로 삼은 견훤왕은 시시한 사내가 아니었다. 비록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자서(自書)’에서 ‘천하의 원흉’이라고 악평하고 있으나 그는 후삼국을 통일해 잃어버린 고구려까지 찾고자 했던 호걸이었다.

그러나 후백제는 짧은 존속기간과 패망한 왕조였기에 쉽게 잊혀졌다. 이 지역 전북사람들조차 기억하기 싫어했다. 견훤왕이 말년에 아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는 사실 하나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러한 승자의 역사해석이 머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원통한 것은 당시 삼국의 모든 서적이 총집결된 전주서고가 불타버렸다는 점이다. 견훤왕은 경주를 침공한 후 그곳에 있던 서적을 모두 전주로 싣고 왔다. 그런데 고려는 전주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전주서고에 불을 질러 역사를 단절시켰다. 실학자 이덕무는 이를 ‘3000년 이래 두 번째 큰 재앙(厄)’이라 애석해했다.

그리고 혹자는 후백제의 짧은 역사를 탓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후백제의 출발 시점은 흔히 무진주(광주)에 입성하여 도읍한 892년부터 936년까지 45년간으로 잡는다. 이 기간은 중국 수나라(581-619년)의 38년에 비해 결코 짧지 않다. 수나라는 혼란한 중국을 통일하고 과거제도, 대운하 건설, 만리장성 재수축 등을 통해 이후 당나라 300년의 초석을 닦았다.

어쨌든 전주가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것은 후백제부터다. 견훤왕이 후백제의 깃발을 전주에 꽂은 덕분에 천년고도(千年古都)가 된 것이다. 이후 450년이 지나 조선 왕조의 발상지가 되었다. ‘왕대밭에서 왕대 난다’는 말이 있듯 후백제가 뿌린 씨앗이 조선왕조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도시가 왕도였고, 왕조의 본향인 곳은 전주가 유일하다.

이제 1100년 동안 묻혀 잠자던 후백제를 깨울 때가 되었다. 때맞춰 1980년대 이래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동고산성 남고산성, 봉림사지 등 곳곳에서 유물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도성 및 왕궁터도 윤곽이 드러나고 후백제의 손길이 미쳤던 전북 동부의 가야문화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제 대대적인 조사와 발굴을 통해 전북과 전주의 정체성을 찾을 시기가 도래했다. 그동안 학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후백제 역사에 시민들도 참여해 ‘전주 바로알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일환으로 지난 6월 11일에는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학술세미나 및 시민토론회가 열렸다. 결과는 5가지로 요약돼 전주시에 전달되었다. 건의사항은 △견훤로에 후백제 랜드마크 조성 △인봉리 주택개발 대안 제시 △후백제 문화관광해설사 교육 및 배치 △후백제 시민강좌 개최 △후백제 역사관(자료관) 건립 등이다.

지금 전국의 자치단체들은 몸집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다. 부울경 메가시티, 대구경북, 광주전남 등의 행정통합이 그것이다. 전북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파트너도 마땅치 않다. 이러한 때 견훤왕의 후백제 국가운영 철학과 역사의식을 전북정신의 탯줄로 삼고 남북통일의 비전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조상진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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