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한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칠순을 맞은 남편의 생일상으로 마을회관에서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식사 대접했다는 이야기다. 오십 가구 남짓한 농촌 마을에 마치 동화책에 나온 잔칫날처럼 도시 고급음식점에서 주문한 뷔페 음식이 마련되고 이장님의 회관 방송을 듣고 마을회관에 오신 동네 어르신들은 모두 흡족한 표정들이셨다는 전갈이다. 몸이 불편하여 참석하지 못한 남편들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챙겨 가지고 가시는 어른들도 계시고 한의사인 둘째 아들이 선물로 준비한 쌍화탕과 십전대보탕을 안고 가셨다는 모습을 그려보니 전해 듣는 내 마음도 흐뭇하고 콧등이 시큰하였다.
나이 들어가면서 이야기로만 듣는 작은 감동에도 울컥해지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처럼 좋은 소식을 듣는 날이면 마치 봄볕이 다시 온 듯 마음이 훈훈해지고 눈을 감고 있으면 꽃이라도 피어날 듯 행복이 다가오는 듯하다. 소식을 전한 선배는 생활이 어려운 후배들을 소리 없이 도와주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셨기에 더 귀감이 되었다. 사랑의 표현이 서투르고 세련되지 못했더라도 마음을 향한 진실함은 언제나 통하는 게 아닐까.
어디 이뿐이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중국에서 사랑 찾아 한국에 시집온 여배우 탕웨이가 축하공연으로 초대 가수가 ‘안개’를 부르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그녀의 따뜻한 심성이 돋보이는 배우였음이리라.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감성은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녀의 짧은 눈물 짓는 모습이 한층 더 돋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본 많은 시청자와 참석한 사람들은 정감 어린 모습에 공감을 함께 나누었으리라. 내 눈에도 눈물이 고여졌는데 그녀의 눈물 속에는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래전 상영된 영화 ‘화장’도 이상 문학상에 빛나는 김훈 원작의 영화이다. 감추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승화시키는 영화라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곳에 기억되어 있다. 비록 영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인연이라는 옷깃 속에서 예기치 않게 상처를 입으면 앓기도 하며 마음도 다치곤 한다. 그런 상황에 최소한 예의마저 놓쳐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면 상처가 되고 덧이 된다는 걸 가해자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후회하게 된다. 세상 속에는 피해자는 분명 있는데 어이없게도 가해자는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좋은 인연과 낮은 인연은, 나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일이다.
벌써 12월 중반이다. 마지막 달력이 흔들거린다. 이래저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행여 겨울을 춥게 만들지 않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요즘 세상살이도 펼쳐보면 웃을 이야기들이 많지 않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정치는 서로에게 잘못을 넘기고 있다. 코로나 장기화에 따른 우울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지고 해결하여야 할 숙제로 쌓여있지만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큰 것을 잃는 어리석음은 갖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아주 작은 이익을 위해 미래의 큰일을 잊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느껴보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도 이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오늘은 산뜻한 지혜를 주는 책들을 두 권이나 받았다. 기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행복이란 작은 마음이 모여진 옹달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산문집과 동화책인데 시인이 많은 세상은 미움이 없는 세상이라 여겨져 많은 시인이 탄생되었으면 하는 기도로 책장을 넘겼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았다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겨울 속으로 점점 깊어가는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본다.
/이종순 교육학박사·아이가크는숲 예솔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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