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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⑤ 새로운 불국토 꿈 꾼 백제 무왕 -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입증하는 왕궁리·미륵사지 유적
[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⑤ 새로운 불국토 꿈 꾼 백제 무왕 -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입증하는 왕궁리·미륵사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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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0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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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에 ‘무왕, 용의 아들’ 기록…금마면 마룡지 등 지역명 뒷받침
미륵사, 3개 사찰 함께 있는 구조…미륵불국토 구현 염원 바탕 창건
왕궁리유적서수부 글자 기와 등 백제 수도 증명 유물 다수 발견돼
▲ 1872년 익산지도에 나타난 백제유적, 미륵사탑, 기준성, 쌍릉, 왕궁유적탑, 궁평(제석사유적) 등.
▲ 1872년 익산지도에 나타난 백제유적, 미륵사탑, 기준성, 쌍릉, 왕궁유적탑, 궁평(제석사유적) 등.

 

해양을 통해 성장한 백제의 공식 수도는 한성(서울 강남) ,웅진(공주), 사비(부여)지역으로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런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지역이 백제의 왕도유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익산지역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은 현존하는 백제의 유일한 왕궁인 ‘왕궁리유적’과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지 유적’이다. 이들 공간은 누가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삼국의 왕중 유일한 용의 아들, 백제 무왕

익산지역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존재는 백제의 무왕이다. 《삼국사기》기록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는데 《삼국유사》 에는 백제 무왕이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용(龍)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주목된다. 즉,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章)인데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무왕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익산지역의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馬龍池)와 주변 용순리지역 명칭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백제 무왕의 신화적 탄생설화는 신라의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었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내용으로 유일하게 용의 아들로 부각된 것은 용으로 상징된 토착성을 잘 보여준다.

△마 캐던 서동, 신라공주의 남편이 되다

한편 무왕은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지었다.”라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무왕은 용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성장한 존재였고 왕의 후손이란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무왕이 범상치 않은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자신의 부인을 얻는 과정 설화이다. 당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서동이 자신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신라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서동과 어울린다는 ‘서동요’를 부르게 해 선화가 왕실에서 쫓겨나자 선화를 맞아 부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 현재의 익산지역에 와서 함께 살 때 선화공주가 생계를 위해 내논 금팔찌를 보고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 이 같은 금이 많다고 하고 금을 모아 신라왕실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서동은 백제에서 신라로 건너가 자신의 부인을 맞이할 정도로 지략과 기개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금을 통해 신라 및 백제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친화력과 포용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한미한 존재로 묘사된 서동과 선화의 만남은 서동과 신라왕실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속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 왕실과 몰락한 백제왕실 세력과의 결합일 가능성도 추측케 한다.

한편 무왕의 왕위등극과 관련된 금관련 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마지역의 금이다.

사실 전라북도지역의 금자 들어가는 지명을 보면 금마와 함께 금제, 금구 등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며 특히, 김제의 경우는 금산과 연결되어 사금이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금은 신화적인 내용이라 하였지만 미륵사에서 멀지않은 왕궁리 유적 공방터에서 금세공 과정의 부스러기 금이 흙속에서 상당량 찾아진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닌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미륵사지 서탑 발굴시에도 규격화된 금으로 된 시주품도 나와 이 지역의 금산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즉 삼국시대의 이름도 금마저(金馬渚)였던 이곳이 진짜 금이 났던 곳임을 알려주며 이 금으로 무왕은 신라와 백성 모두에게 인심을 얻었음을 알 수있다. 이같이 무왕은 익산지역의 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방세력이거나 몰락한 왕손 중 익산에서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성장한 세력일 가능성이 보여진다.

이같이 용(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륵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결국 무왕은 이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 고유의 용신앙과 불교신앙인 미륵하생신앙(미륵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을 연결하여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증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왕,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 미륵사와 왕궁을 건립해 새 희망을 꿈꾸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미륵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금당과 탑, 회랑 등을 세 곳에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미륵사의 배치는 중원과 동·서 삼원으로 3개 사찰이 함께있는 구조임이 밝혀졌다.

▲ ①2009년 발견된 미륵사석탑 기둥돌 구멍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봉안기, 639년 사리가 모셔졌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되어 많은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 ①2009년 발견된 미륵사석탑 기둥돌 구멍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봉안기, 639년 사리가 모셔졌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되어 많은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미륵사 서원에 세워져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미륵사지석탑은 2009년 1월 1층의 제1단 기둥돌 상면에서 사리를 모신 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사리장엄과 봉안기록 등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2017년 남아있던 6층까지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미륵사의 창건배경은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예를 고려할 때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무왕은 현세에서 부처를 돕는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익산은 무왕이 이루고자 한 미륵 불국토의 땅으로 볼 수 있다.

▲ 왕궁리유적 복원추정도 (우, 정원복원 상상도) 가로 세로가 245m, 490m로 중국의 도성,왕궁제도를 구현하였다. 서울,공주,부여공간에서는 확인 안된 백제의 전형적인 통치와 생활공간 및 부엌, 화장실, 정원, 공방 등 다채로운 백제의 삶을 보여주는 유일의 왕궁공간이다.
▲ 왕궁리유적 복원추정도 (우, 정원복원 상상도) 가로 세로가 245m, 490m로 중국의 도성,왕궁제도를 구현하였다. 서울,공주,부여공간에서는 확인 안된 백제의 전형적인 통치와 생활공간 및 부엌, 화장실, 정원, 공방 등 다채로운 백제의 삶을 보여주는 유일의 왕궁공간이다.
▲ 미륵사 복원 상상도.
▲ 미륵사 복원 상상도.

따라서 무왕은 백제를 불교를 통해 신성국가로 중흥하려하였고 이를 위해 익산지역에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익산 천도문제는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찾아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 내용중에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만들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지”는 ‘삼국사기’에는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이곳이 금마(金馬)로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별도로 표현되어 백제 천도설, 별도설, 신도설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그런데 왕궁유적 등에서 발견된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수도를 뜻함)’ 글자 기와의 존재와 왕궁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이 수도의 왕궁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을 지어 천도를 위해 새로 도성을 조성하였다.

이같이 백제의 무왕(武王)은 금마로 왕도를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당시 미래의 구세주 신앙인 미륵신앙을 백제불교의 주축으로 하고 호국적인 나라의 사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불교 수호를 자임한 자신의 궁궐의 근처에는 토착신과 연결되는 제석사를 창건해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왕은 익산지역에 백제를 새롭게 중흥시키기 위해 수도를 만들어 옮기고 미륵 불국토신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백제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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