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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대학 시절 어느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배가 난파되었는데 하나뿐인 구명보트에는 2명만 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배우자, 아들, 나 이렇게 네 명이 남았습니다. 누구를 구명보트에 태우겠습니까? 많은 의견이 다양한 이유와 함께 나왔다. 심지어 아무도 타지 말고 온 가족이 같이 죽자라는 주장까지. 10여 년 전 의료 수준과 장비가 극도로 열악한 나라에 국내 모 투석회사가 혈액투석기 2대와 관련 물품을 무상으로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혈액투석이 낯선 그 나라 의사들에게 의료 기술 전수를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투석기가 2대 밖에 없는 그 병원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씩 평생 투석을 해야 하는 말기신장병 환자 대신 1~2주 정도만 투석으로 버텨주면 콩팥 기능이 회복되어 살아날 수 있는 급성신손상 환자에게만 투석 치료를 하고 있었다. 제한된 의료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궁여지책이었던 셈이다.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대량 전상자 분류는 의무부대의 가장 중요한 훈련 중 하나였다. 전쟁으로 많은 병사가 다치거나 죽은 상황에서 군의관과 위생병은 전장을 누비며 환자들에게 빨강, 노랑, 초록, 검정 표식을 달아줬다. 빨간색은 빨리 치료하면 살 수 있지만 위중한 환자, 노란색은 위독하진 않으나 조기 치료가 필요한 상태, 초록색은 가벼운 부상, 그리고 검은색은 적극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어렵거나 이미 사망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우선순위 표식을 보고 환자를 후방으로 옮겨서 치료하는데, 이 중증도에 따른 치료 우선순위 분류법을 선별을 의미하는 트리아지 (Triage)라고 부른다. 트리아지는 1797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군의관이던 도미니크 장 라레가 전쟁터 부상병을 치료 가능한 곳으로 빨리 수송하기 위해 날으는 앰뷸런스 (Ambulance volante)라는 이름을 가진 -비록 날 수는 없었지만 날듯이 빨리 후방으로 환자를 옮기는- 마차 형태의 운송 수단과 함께 처음 도입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현재 많은 응급실과 재난 현장에서 이 분류법에 따라 우선순위를 두고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환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의료 장비와 침상, 인력이 바닥난 나라 의사들은 끔찍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누구에게 인공호흡기와 중환자실을 우선 배분할 것인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포기할 것인가? 환자로 넘쳐나던 일부 병원에서는 실제로 나이가 많거나 아주 위중한 환자는 인공호흡기 대신 산소만 공급받기도 하였다. 인력과 장비가 충분하다면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살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중환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자원과 인력 한계로 모든 환자에게 같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생존 가능성이 큰 환자에게 치료를 집중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선택적 의료 배급(rationing care)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평소 생명 존중을 최상의 가치로 삼던 의사들이다 보니 살릴 자와 죽을 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기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회생 가망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 쏟을 시간과 인력, 장비를 살릴 수 있는 환자에게 더 집중하여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려는 최대 다수의 최대 구명,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라는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공리주의의 재난 버전이라고나 할까. 지난주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맞을 것인가, 어떤 백신이 내게 돌아올까 관심도 많고 말이 무성하다. 백신 접종 순서는 희생자를 최소화하면서도 빠르고 효율적으로 코로나19를 물리치는 방향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백신 접종 순위에 빨강, 노랑, 초록 표식은 있어도 검은 표식은 없다. 전 국민에게 돌아갈 충분한 양이 확보되었다고 한다. 내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빠짐없이 맞는 일만 남았다.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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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4 18:27

국민의힘 이제는 다를까?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민심은 오늘날 주로 여론조사로 읽는다. 그리고 정치권이 민심을 얻었느냐 얻지 못하였느냐는 선거결과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DJ 사례와 최근 보수 야권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DJ의 경우 1987년 치러진 13대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진영에서는 김영삼?김대중 양김 단일화의 요구가 컸다. 그러나 단일화 논쟁에서 수세에 있던 김대중은 단일화를 거부했는데 그 근거로 자신이 앞서있다는 여론조사를 내세웠다. 문제의 여론조사는 친 김대중진영의 단체가 실시한 조사였으나 엄밀한 표본의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김대중에게 유리한 결과였다. DJ는 이러한 여론조사 수치를 근거로 자신이 앞서있기에 후보를 양보할 수가 없다고 끝내 버텨 후보단일화가 무산됐다. 결국 13대 대선에서 결국 노태우가 36.6% 역대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 뒤를 이어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1%로 김대중은 3위를 차지했다. 선거결과는 참혹했다. 단일화를 거부한 양김 중 3위를 한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인지라 결국 DJ는 자발적으로 정치은퇴까지 선언한다. 그후 김대중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13대 대선의 정치적 책임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전략을 바꾼다. 그 유명한 뉴DJ플랜이다. 이때 뉴DJ플랜은 이미지 전략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여론을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DJ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원하는 DJ로 스스로 바뀌어 다가간 것이다. 물론 당시 재야세력의 반발은 컸다. 그럼에도 DJ는 여론에 대한 대전환을 했고 여론을 바로 읽고 따랐기에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2017년 19대 대선에서 보수진영은 홍준표를 내세워 문재인과 대결했다. 그러나 결과는 문재인 41.1%, 홍준표 24.0%로 보수진영이 역대 최대 참패를 한다. 당시 홍준표 후보는 선거기간동안 여론조사에 대해 가짜여론조사라거나 내가 이긴다는 식으로 여론조사를 무시했다. 그러다 보니 홍준표는 선거기간동안 선거전략을 바꿀 이유가 없었고 끝까지 홍준표 특유의 선거캠페인을 이어 갔으며 결국은 선거에 참패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미래통합당으로 그리고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바꾸고 비대위 체제로 생존을 위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대선과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그리고 올 4월과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국민의힘 정당지지도, 차기대권주자 지지도, 서울시장후보 지지도 등 각종 여론지표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왜 국민의힘 관련 각종 지표가 지지부진한가? 그 이유는 여론을 대하는 보수진영의 태도 문제다. 국민의힘이나 과거 보수당의 여론관의 특징을 보면 첫째 여론을 자신의 시각으로 읽는다. 국민의 눈이나 심지어 지지층인 보수의 눈으로도 읽지 않는다. 두번째는 취사선택이다. 즉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세번째는 여론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한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싶은 것만 보니 여론은 아주 단순해 보인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이다. 여론이 무겁거나 두렵지도 않다. 그러니 따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맞서거나 바꾸려 든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대중관은 국민을 객체로 본다. 기본적으로 민심을 따르기보다는 가르치거나 맞서거나 때에 따라서는 조작 통제의 대상이다. 이렇게 되는 순간 정치인은 갑이되고 국민은 을이 된다. 즉 정치인의 갑질이다. 그것도 여당도 아닌 정권을 잃은 야당인 국민의힘이 이런 여론관을 가지면 각종 여론지표가 낮을 수밖에 없다. 곧 큰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는 여론을 정확히 읽고 시민이나 국민이 원하는 정책과 공약, 그리고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쪽이 올 4월 서울시장 선거와 내년 대통령선거의 승자가 될 것이다. 대선 3수를 한 DJ는 늦게라도 이러한 민심을 알았기에 대통령 꿈을 이루었다. 탄핵을 당하고 이어 대선?지방선거?총선 연이어 참패를 한 국민의힘이 이번엔 다를 수 있을는지 여부는 오로지 민심을 제대로 읽어내느냐에 달렸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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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25 16:28

쓰레기 분리수거의 날에 생각한 것들

장석주 시인 화요일은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이다. 재활용할 종이, 박스, 비닐, 유리병, 플라스틱, 스티로폼 등을 분리해서 내놓는다. 여러 가구에서 나온 생활 쓰레기가 작은 동산을 이룬 것을 볼 때마다 가느다란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가 이용하던 신선식품 배송 업체는 식품을 제각기 다른 박스에 담아 배송한다. 박스를 줄여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을 했으나 시정되지 않아 배송업체를 바꾸었다. 새 배송업체는 주문 식품을 한 재활용 비닐박스에 넣어 배송하고 다음 배송 때 수거해간다. 따로 버릴 박스가 없으니 그만큼 분리수거의 필요를 덜어주는 것이다. 지구 인구가 늘면서 쓰레기의 배출량도 늘어난다. 자연을 가공하는 문명화 과정에서 쓰레기 발생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손에서 설계와 제작을 거쳐 나온 물건은 본디 쓰임을 다하고 폐기될 때 쓰레기로 돌아간다. 쓰레기란 인간의 관점에서 효용 가치가 다한 자연이다. 인간이 생산과 창조 활동을 하는 곳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생산의 이면에 가려진 비밀이고, 그 처리는 인간이 풀어야 할 영구적 난제 중 하나다. 산업 쓰레기와 생활 쓰레기가 지구의 생태학적 균형을 깨트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쓰레기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일까? 누군가에겐 쓰레기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자원이다. 쓰레기는 그 용도를 미처 찾지 못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쓰레기는 매혹과 혐오라는 양면성을 다 갖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쓰레기는 모든 창조의 산파인 동시에 지극히 가공할 만한 장애물이다.라고 말한다. 지구 인구가 10억 명이 되는데 20만년이 필요했지만, 70억 명이 되는데 불과 20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구에 생육하고 번성한 인류는 자연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과부하로 인한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 지구 자원을 제 마음대로 퍼 쓰는 인류의 번성은 지구 생태계에는 미증유의 재앙일 테다. 인류는 육류와 동물성 제품을 얻으려고 680억 마리의 가축을 사육한다. 가축 사육에 어마어마한 곡물을 쓰고, 울창한 숲을 목초지로 바꾸며, 인간이 쓰는 담수 3분의 1을 쏟아 붓는다. 축산업이 전 지구적으로 온실가스의 18퍼센트를 발생시킨다.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로 이루어진 온실가스는 기후재난의 주요 원인이다. 지구는 지난 세기보다 더 자주 기상 이변을 겪는다. 초강력 태풍이 오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잦은 가뭄과 물 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대기와 해양은 각종 쓰레기로 뒤덮여 간다. 사하라 사막에 난데없는 폭설이 내리고, 페루 바닷가는 죽은 정어리 떼로 뒤덮이며,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가 강으로 떨어져 나와 홍수를 일으켜 인근의 수력발전소 댐을 붕괴시키고 마을을 휩쓰는 것도 기후변화의 영향이다. 기후재난은 지구 생태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다는 전조 증상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우리가 날씨다에서 기후변화는 재깍거리는 시한폭탄이다.라고 경고한다. 우리 안에 퍼진 무관심 편향이 기후재난이라는 시한폭탄이 재깍거리는 시작점이다. 오늘 태어난 아기에게 지구라는 초록별에 온 걸 축하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인류는 미래 세대에게 생태적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 깨끗한 대지와 공기 들은 미래 세대가 누릴 것을 빌려 쓰는 셈이다. 쓰레기는 소각되거나 땅에 묻혀 썩는다. 하지만 잉여의 쓰레기는 늘 골칫덩이다.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 쓰레기는 대양에서 섬을 이루고 떠돈다. 전 세계가 한 목소리로 탄소발자국을 줄이자고 한다. 그것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은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인간 사회는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종의 초유기체, 즉 하나의 덩어리다. 한 사람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이고, 모두의 문제는 결국 한 사람의 문제다. 인류가 현재 수준의 쓰레기를 지속적으로 배출한다면 지구는 곧 쓰레기로 뒤덮일 테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 각자가 생태적 각성과 더불어 쓰레기를 덜 배출하는 윤리적 실천에 나서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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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8 17:18

김치, 이제는 세계인의 음식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입춘을 앞두고 강풍과 한파가 동시에 휘몰아치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은 때 아닌 김치 종주국 논란으로 뜨겁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김치의 종주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중국이라고 한다. 문제의 중심이 된 곳은 구독자 1400여만 명을 둔 중국인의 유튜브였다. 유튜브를 찾아들어가보니 출연자가 밭에 나가 뜯어온 배추로 김치를 담그나보다. 밀가루 풀을 쑤고 풀이 식기도 전에 고춧가루를 넣고 양념을 하여 김치를 담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돼지고기를 썰어 넣고 김치찌개를 만들고 해쉬 태그에 chinese food라고 달아 놓았다. 이것을 본 젊은 한국인 유튜버가 김치는 한국이 종주국인데 왜 김치를 chinese food라고 하느냐고 한 것에서 논쟁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두 젊은이가 인터넷상에서 벌인 논쟁에 두 나라의 언론이 반응을 하였고 김치와 관계가 있는 유관기관에서는 대책마련에 고심하나보다. 김치는 중국에서 파오차이(泡菜)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이 논쟁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김치는 고유명사다. 중국에서도 김치를 김치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중국어 발음에는 김이라는 발음이 없다. 가장 근접한 발음을 찾아봐도 진아니면 신이다. 그렇다면 진치, 신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 발음으로 김치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에서 한국의 김치를 표현할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 발음은 없고 중국의 쓰촨성에 파오차이라는 요리가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이니 한국파오차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김치는 배추를 절이고 젓갈과 고춧가루 새우젓 등을 무에 버무리고 비벼서 배추의 사이사이에 속을 채우고 김칫독에 꾹꾹 눌러 담은 후 발효가 되면 먹는다. 반면 쓰촨파오차이는 산초, 계피, 팔각, 월계수잎 등의 향신료를 물에 넣고 끓여서 식힌 다음 물에 소금 파 마늘 양배추 무 당근 셀로리를 썰어 넣고 고량주를 넣는다. 가장 빠르게는 일주일에서 보름 후부터 재료만 건져서 먹고 그 국물에 또 채소를 넣고 발효되면 또 재료만 건져 먹는 음식이다. 우리의 김치가 김칫국까지 모두 먹는 반면 파오차이는 국물을 먹지 않는다. 김치와 파오차이는 이렇게 다르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므로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김장을 담아 저장을 해야 했다. 고춧가루는 색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방부제 역할을 하고 젓갈은 발효를 촉진시켜 맛난 맛을 내고 있다. 쓰촨파오차이를 만들어내는 쓰촨지역은 중국의 서남부에 땅이 아래로 움푹 들어간 분지를 이루고 있다. 여름에는 무척 습하고 더우며 겨울은 속으로 스미는 음습한 추위가 스민다. 따라서 여름은 더위를 식힐 음식으로 겨울은 입맛을 돋을 수 있는 음식으로 파오차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음식은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먹기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지고 전파된다.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음식문화와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융합되기도 하고 또 다름 음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정착되기도 한다. 간혹 어떤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긴장상태가 되더라도 민간인들이 문화, 예술 방면의 교류를 통해서 두 나라 사이의 얼음을 녹이는 과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꾸로 김치논쟁이 정치적으로 번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된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음식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식세계화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 세계각국사람들이 한식에 대해 혹은 김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종주국의 개념은 어디서 발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발전시켜 나아갔느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 김치를 어떻게 만들어 어떻게 잘 팔 것인가 각 방면으로 연구를 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뉴욕의 한 복판에 김치는 한국 것이라고 쓸 것이 아니고 통 크게 김치는 세계인의 것이라고 써야 할 때아닌가.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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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04 16:58

100년이 지났어도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전염병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학교극장상점은 폐쇄되고 모임도 금지되었다. 마스크 착용은 의무화되고 마스크 없이는 외출도 대중교통 이용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심지어 담배 피우려고 마스크 벗는 사람까지 체포하여 벌금을 부과하거나 구류에 처했다. 장례식은 15분 내에 끝내도록 제한되고 도시마다 관이 동나고 묘 파는 인부와 장의사가 부족한 사태가 발생했다. 도로에 화학 약품이 살포되고 일부 도시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 없이는 출입할 수 없었다. 의료 인력이 부족하자 자원봉사자, 군의관을 동원했으며 급기야 의과대학 3, 4 학년 과정을 중단하고 학생을 병원에 투입해 의료 업무를 맡겼다. 익숙해 보이는 이 장면은 코로나19 대유행을 겪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100년 전 16억 세계 인구 중 6억 명 감염에 5000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 당시 상황이다.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스페인 독감. 1918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이 정식 명칭이지만 보통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스페인은 억울하다.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미국 캔자스에서 시작되어 인근 신병 훈련소로 확산된 독감은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 파견된 미군을 통해 유럽 전역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참전국들은 적국에 이로운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아군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검열을 강화하는 등 독감 관련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에서는 언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스페인에서만 800만 명의 환자가 발생하자 독감과 그 영향에 대해 깊이 있게 보도하였다. 여기에 더해 국왕 알폰소 13세까지 감염되면서 스페인은 오명을 뒤집어썼다. 예년 독감과 달리 스페인 독감은 폐렴으로 빠르게 진행하여 걸린 지 2, 3일 만에 사망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았다. 밤 늦도록 카드 게임을 같이 한 여성 4명 중 3명이 다음 날 아침에 죽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특이한 점은 젊은 인구의 높은 사망률로 희생자 대부분이 65세 이하였으며 특히 20~45세가 전체 사망자의 60%를 차지하였다. 세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차 세계대전 희생자보다 3배나 많아지자 전쟁은 서둘러 매듭지어졌고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독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2019년 12월, 중국 어느 도시에서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감염병이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고 그저 중국의 한 도시에서 생긴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교통의 발달과 사람의 이동이 많다 보니 급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국경을 봉쇄하였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100년 만에 다시 겪는 대유행! 워낙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치료제도 백신도 없다 보니 100년 전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동 제한, 모임 금지, 상점 폐쇄, 도시 봉쇄 그리고 마스크와 거리두기, 손씻기.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0년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2018년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가 발표한 스페인 독감 100주년 기념 구호 우리는 기억하고 대비한다.(We remember. We prepare.)처럼 인류는 전염병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왔다. 역학 조사를 통해 환자를 조기에 발견격리하여 감염 전파를 최소화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염기서열을 밝혀내고 신속한 진단 기술을 개발하였다. 음압 병상, 인공호흡기 등으로 중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100년 전 같았으면 죽었을 환자도 이제는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축적된 의학 기술의 발달 덕분에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항체 치료제와 백신 개발로 코로나19를 물리칠 날이 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음 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고 한다. 일 년간 힘든 날을 견뎌온 우리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손씻기, 거리두기, 그리고 마스크.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는 그날까지!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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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8 17:02

문 대통령 지지율과 레임덕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대통령 임기 1년 4개월을 남겨 둔 연말연초에 여러 대통령 지지율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각종 신년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35% 전후 까지도 내려가는 등 대체로 3540%의 지지율을 보였다. 최근 한길리서치 1월 2주 조사에서는 40.7%, 갤럽 1월 2주 조사는 38%였다. 그럼 대통령 지지율이 얼마가 되었을 때 레임덕으로 봐야 할까?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없다. 단지 역대 대통령의 4~5년차 무렵 레임덕 현상을 보인 시기의 지지율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역대 대통령의 경우 30%가 무너지면 레임덕 현상을 보이고 20%가 무너지면 레임덕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단순지지율로만 판단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레임덕 여부를 판단하려면 단순 지지율뿐만 아니라 지지율의 강도와 정치적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단순 지지율은 정량적 측면이고 지지율 강도는 정성적 측면이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은 수치와 강도의 역학이 작동되는 에너지의 장이 된다. 먼저 문 대통령의 단순 지지율로 레임덕 여부를 보면, 현재 문 대통령의 35% 전후40% 초반 지지율로는 레임덕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성적 측면 즉 지지율의 강도를 보면 달라진다. 한길리서치 1월 2주 조사의 대통령 긍정평가는 40.7%지만 아주 잘하고 있다는 20.9%, 다소 잘하고 있다는 19.8%다. 반면 부정평가는 56.9%인데 아주 잘못하고 있다는 41.3%, 다소 잘못하고 있다는 15.6%다. 이러한 문 대통령 지지율 분포 모양은 바가지를 업어놓은 모양(정규분포)이 아니라 바가지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분포다. 즉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중립적 합의형이 아니라 대립적 갈등형 분포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지지율의 전체 긍정평가(40.7%) vs 부정평가(56.9%) 배율이 1.40이지만, 매우긍정(20.9%) vs 매우부정(41.3%) 배율은 1.98로 더 커진다. 결국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힘도 크지만, 레임덕 원심력인 비토층의 힘이 두 배나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통령의 레임덕에 대한 심리적 체감 현상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적 상황이다. 문 대통령은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다시 말해서 생태적으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탄핵을 처음부터 반대했던 보수층의 반동적 저항은 당연히 강하다. 또한 중도층도 탄핵에 동의했기에 현 정부에 대한 잣대나 기대치는 전 정부 보다 더 높고 엄격하다. 이런 정치적 역학의 상황을 감안하면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전의 대통령에 비해 10%p 정도는 더 높아야 한다. 즉 정치적 역학을 감안하면 문 대통령의 40% 지지율은 과거 대통령의 30% 정도 지지율의 국정장악력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 대통령의 단순 지지율 3540% 수준으로는 레임덕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비토그룹의 크기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한 체감 지지율은 레임덕 상황이다. 그래도 현시점에서 이 정도의 문 대통령 지지율은 이전 정권보다는 선방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은 4년 동안 국정수행에 대한 결과적 평가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의 국정운영의 동력이다. 그럼 문 대통령의 임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지지율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과거 정권 말기 레임덕이 시작된 30%보다는 10%p는 더 높은 40% 수준이다. 그런데 임기 말 대통령 지지율을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임기 말은 국민들이 임기 초기 기대감으로 바라보던 허니문 기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내심으로 4년을 기다린 국민들은 구체적 성과를 보고 평가한다. 따라서 임기 말 대통령이 정쟁을 통한 비교우위나 책임전가, 현란한 언변(레토릭), 인사나 국면전환용 대증요법으로 국정운영을 하면 역효과가 나타난다. 국민의 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진정성과 소통의 리더십으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 사회양극화가 해소되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다. 그러기에 당연히 문 대통령도 이 기대에 대한 성과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통일희망열차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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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21 14:43

호로고루 사적지에서

장석주 시인 새해 들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늙는다는 실감이 또렷해진다. 눈이 침침하고 근력은 떨어졌다. 명민함과 정기도 사라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이 듦의 기색이 완연한 내 모습에 놀란다. 늙는 건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다. 노년의 실감이 늘 생경하고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듦과 죽음은 노력하지 않아도 맞는 실존 사건이다. 오늘 아침 라디오 국영방송 채널을 틀어놓은 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죽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전두엽에 번개처럼 꽂혔다. 나는 죽음을 걱정했던가? 그건 우주의 섭리이고, 풀어야 할 실존의 수수께끼일 뿐인 것을. 북극의 한랭전선이 남진하며 매운 추위가 몰려왔다. 한강이 얼음으로 덮이고, 중부 내륙도 얼었다. 오후에 집을 나서 호로고루(瓠蘆古壘) 사적지를 찾았다. 집에서 멀지 않아 답답할 때면 찾는 곳이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비강(鼻腔)으로 밀려든 찬 기운이 식초인 듯 따가웠다. 평지로 내려서니, 언 강과 응달 쪽 잔설, 쨍 하니 파란 하늘, 임진강 너머에서 남쪽을 향해 나는 쇠기러기 떼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에서 쇠기러기나 두루미 같은 겨울 철새가 자주 목격되는 것은 철새들 먹잇감이 흔한 들녘과 장항 습지, 임진강이 한데 몰려 있는 탓이리라.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의 임진강변 현무암 절벽 위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 사적지다. 호로고루는 임진강의 옛 이름을 호로하(瓠蘆河)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일대는 기원 6세기 중엽 이후 2백여 년 간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아들이던 이들이 고향에 부모 형제 처자식을 두고 떠나와 낯선 땅에서 무장을 한 채 국경을 지키느라 낮과 밤을 흘려보냈으리라. 스무 해 전쯤 유적 발굴조사로 땅 속에 묻혀 있던 삼국 시대의 성벽과 우물이 나오고, 다수의 연화문 와당, 토기, 철기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은 평평한 구릉에 고구려 점령기에 쌓은 성벽과 성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강변 갈대숲에서 날지 않는 쇠기러기를 만났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사체는 얼어서 딱딱했다. 함부로 방치된 조류 사체는 죽음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임을 말한다. 천지간에서 나고 죽는 건 사람이나 조류나 마찬가지다. 1500년 전 번성하던 고대 국가의 흔적을 밟고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는 일은 범상하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성벽을 쌓고 전쟁을 치른 이들은 무명의 병사들이다. 더러는 전쟁 중 팔다리를 잃은 채 귀향하고 더러는 차디찬 주검이 되어 낯선 땅에 묻혔으리라. 공자는 물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흘러감이 마치 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시간은 저 아득한 근원에서 흘러와서 현재에 닿건만 현재는 유동하는 가운데 또 다른 현재에 닿는다. 인간은 그 유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멸의 연쇄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명은 나만의 것인가? 생명은 부모에게 받은 것, 내 의지로 살아낸 것,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다. 세 겹인 것을 굳이 내 것으로 한정할 때 생명이 품은 뜻은 협소해진다. 사람도, 새도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간다. 오래된 경전에 말하듯이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티끌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젊을 땐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세월을 헛되이 썼다. 괴로워 술을 마시고 방황하던 젊은 날의 내 어리석은 선택과 행위들이 뼈에 사무친다. 결핍에 허덕이느라 현재에 더 충실하지 못했다. 너무 젊었던 탓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한 줌 지혜도 품지 못한 채 늙고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에 쓸쓸해진다. 나이 들어 대리석을 깎아 새 집 지을 욕망 따위는 품지는 말아야 한다. 차라리 무덤을 생각하며 비감에 젖는 자에게 한 줌의 지혜가 있으리라. 이제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는 걱정거리는 내려놓자고 다짐한다. 오늘은 호로고루 사적지를 다녀왔고, 날 풀리면 속초의 겨울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강사로 활동하며 시집 햇빛사냥, 산문집 등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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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14 16:50

국민의 마음 읽기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영하 15도에 눈까지 내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달력을 보니 소한이 지났다. 어른들이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 소한 추위는 꾸어라도 한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소한이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봄이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일간지의 뉴스를 훑어보니 이번 주는 부동산에 관한 뉴스와 주식 뉴스가 크게 보인다. 작년 한 해 동안 아파트값이 20%나 올랐고 올해도 떠 오른다고 한다. 주식은 코스피 3000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렇게 다 오르는데 어째 내려가는 것이 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지지율이 36.6%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지율 하락의 주원인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인가 보다. 대통령은 공공임대주택을 방문해서 2022년까지 총 650만 호를 공급하겠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공공임대주택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신임 국토부 장관은 양질의 값싼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줘서 집값을 안정시키겠다 설날 이전에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또다시 스물다섯 번째로 발표되는 특단의 대책에 관심을 가져본다. 1970년대에 방주연이라는 가수가 당신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모래밭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 코, 입 모두 그리고 입가에 미소도 그렸지만 당신의 마음 그 한 가지는 몰라서 못 그렸다는 내용이다. 마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현 정부가 한가지 놓친 것이 있다. 무엇이든 단숨에 다 이루고 성과를 내려고 하다 보니 국민의 마음 읽기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첫째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기도 힘들다. 핸드폰에서 화면을 누르지 않아도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면 전화를 걸어준다. 곧 자율주행차를 타게 된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했더니 이런 변화가 모두 4차 혁명시대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둘째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하여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상을 살아내기에 힘들다. 젊은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도 집 한 채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있고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서 한 칸 장만한 사람들은 세금 때문에 시름이 깊다. 셋째 정부와 소통이 안돼서 힘들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려나 보다. 기자회견이라는 단어도 오랜만에 듣는다. 왕이 종과 북을 치고 피리를 불고 노래를 하자 백성들은 왕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곤궁하게 해 놓고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시끄럽게 노래를 하느냐며 이마를 찌푸렸다. 왜냐하면 임금이 백성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서 즐겁게 놀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이 종과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노래를 했더니 백성들이 우리 임금님께서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가. 음악 소리가 참으로 즐겁다고 했다. 이는 임금이 백성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맹자 <양 혜왕 하> 편에 있는 내용인데 소통과 함께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구절이다. 중국 청대 문인이면서 관직에 종사했던 원매 선생은 그가 지은 조리서 <수원식단>에서 위정자가 할 일은 한가지 정책을 더 만드는 것보다 국민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폐단 한가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본다면 스물다섯 번째 발표될 부동산 정책 특단의 조치는 새로운 묘수를 만들어내는 그 것보다는 이미 있는 정책 중 폐단으로 여겨지는 한 가지를 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이것은 그동안 각계 각층에서 정부에 대고 수도 없이 외쳐온 규제 철폐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나라이건 기관이건 간에 리더가 몇 명의 참모만 가지고 좋은 나라 좋은 기관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국민이 원래 자기가 살아오던 방식대로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데 무엇이 불편한지 그 불편함을 제거해 주는 것이 정치다. 어디 그런 세련된 정치를 할 사람 없는가?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 △신계숙 교수는 저서로 역사로 본 중국음식, 수원식단(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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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7 17:24

쥐의 해 가고 소의 해 오라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콜레라, 말라리아, 독감, 에이즈 등 인류를 공포에 떨게한 수많은 전염병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과 지금은 박멸된 적사병(赤死病)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가 아닐까 한다. 흑사병은 페스트균을 벼룩이 쥐로부터 사람에게 옮기는 병으로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키면서 중세 암흑기를 끝내고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역사를 바꾼 전염병이다. 흑사병은 14세기 중앙아시아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하여 몽골군이 서쪽으로 침략할 때 따라왔다. 1346년 몽골군은 흑해 북쪽 제노바 무역 기지 카파를 포위 공격하면서 흑사병으로 숨진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성벽 안으로 던져 넣어 적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생화학 테러의 원조인 셈이다. 그 시체에 있던 페스트균은 벼룩을 통해 쥐에게 옮겨갔고 그 쥐는 상인들의 화물선에 무임 승선하면서 이탈리아반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때 배고픈 고양이들이 쥐들을 열성적으로 공격한 덕분에 흑사병은 조금 주춤하기도 했으나 가톨릭 교회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불태워 없애기 시작하면서 마르세이유에서는 고양이 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로 인해 쥐들은 대거 흑사병을 퍼뜨렸다. 마침 수년간의 대기근으로 허약해진 유럽인들은 속수무책 쓰려졌고 유럽 사회는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 절대 진리로 군림하던 가톨릭교회조차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회개하고 고행을 하거나, 반대로 종교를 버리고 어차피 죽을 거 즐기다 죽자며 쾌락주의로 빠져들었다. 전염병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염자, 유대인, 이교도, 나병환자를 악마로 몰아 화형 시켰다. 인구가 너무 많이 줄어들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농노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장원제도는 붕괴되고 중세를 지배하던 종교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르네상스가 싹트기 시작했다. 쥐들이 퍼뜨린 흑사병이 중세를 무너뜨린 것이다. 흑사병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무서웠던 전염병으로 천연두가 있다. 천연두는 오랜 기간 인류를 괴롭혀 왔는데 이집트 파라오 미라에도 천연두 마마자국이 남아 있고 수백 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우수한 무기보다는 신대륙에 옮겨간 천연두가 원인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매년 40만명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감염자의 20~60%, 소아는 80%가 사망한 무서운 질병이었다. 살아남아도 얼굴에 마마자국이 남거나 합병증으로 실명하는데 18세기 런던 수용소의 시각장애인 중 2/3가 천연두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 천연두가 1979년 드디어 지구상에서 영원히 박멸되었는데 거기에 소가 큰 역할을 했다. 예로부터 천연두를 막기 위한 시도로 천연두 환자의 고름 딱지를 피부나 코에 접종하는 인두법이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 시행되었지만 인두법은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감염시키기 때문에 심각한 부작용이나 사망,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시골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소젖 짜는 여인들이 우두(牛痘)를 앓고 나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두를 접종하면 소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어 우두 접종이 쉽지 않았다. 1796년 5월 소젖 짜는 여인 사라 넬름즈의 손의 우두 고름을 하인의 아들 8살 제임스 핍스의 팔에 접종한 후 2개월 지나 천연두 고름을 접종시켰으나 천연두가 생기지 않았다. 이를 왕립 협회에 보고하였으나 인증을 받지 못하자 제너는 자비로 우두법에 대한 논문을 발간하며 홍보했고, 많은 시간이 지난 끝에 인증을 받았다. 제너는 자신의 이 예방 접종법을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가져와 백신 (vacc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암소 덕분에 전 인류는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쥐의 해 2020년이 지나가고 소의 해 2021년이 밝았다. 쥐의 해에는 쥐가 퍼뜨린 흑사병만큼이나 코로나 대유행으로 전 인류가 힘들었다면 소의 해에는 소(vacca)로부터 시작된 백신으로 인류가 코로나19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해 본다. 희망찬 새해! △김성호 과장은 경북대 의과대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북대병원 전공의, 신장내과 전임의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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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1 15:34

신 고군산군도

김철규 수필가 한반도 서해안 중심지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양 날개로 한 반도형 항구도시다. 또한 고군산 군도라는 부속 섬들을 갖고 있으나 새만금 사업으로 이들 섬 대부분 육지가 되었다. 즉 긴 역사 속에 외톨이 섬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고군산 군도이지만 지금은 지난 2010년 4월에 비응도를 출발점으로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까지 연결도로로 인해 육지가 된 것이다. 육지가 됨으로 인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곳을 갈수 있다. 나는 고향이 야미도인지라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이다. 고군산군도는 천혜의 절경을 품은 보물이다. 동해안이나 남해안에서도 볼 수 없는 풍광에 도취되는 곳이다. 그래서 고군산군도 중심지인 선유도에는 선유8경이 있다. 선유8경은 좀 다른 특징적인 8경이다. 1,선유낙조(仙遊落照) 2,망주폭포(望主瀑布) 3,삼도귀범(三島歸帆) 4,월영단풍(月影丹楓) 5,명사십리(明沙十里) 6,평사낙안(平沙落雁) 7,장자어화(壯子漁火) 8,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이 선유8경이다. 선유도에서 선유낙조, 망주폭포, 명사십리, 평사낙안, 삼도귀범을 감상할 수 있다. 명사십리는 선유해수욕장의 보배이며 해당화가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나는 여름이면 선유도해수욕장을 가끔 찾았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가면 명사십리를 달밤에 거닐 수 있다는 생각, 해당화를 본다는 마음은 나로 하여금 선유도해수욕장을 찾게 만든다. 전주에서 직장에 다닐 적에 여름휴가는 가족과 함께 야미도에 계시는 부모를 보기위해 매년 다녀온다. 그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선유도 해수욕장엘 꼭 간다. 1박을 하면서 밀가루 같은 명사십리를 달밤에 거닐던 생각은 지금도 머리를 스친다. 70년대에는 지금처럼 개발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해수욕장이 있을 뿐 명사십리 사구에는 해당화가 장식되어있어 해수욕객들의 눈을 못 돌리게 할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평사낙안에는 오랜 세월 폭풍을 견뎌낸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사진작가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잡목이나 풀도 거의 없는 평사낙안을 지키는 이 소나무 한그루는 외롭게 7-80년을 버텨오다가 몇 년 전에 심한 태풍으로 생을 마감했다. 주민은 물론, 이 소나무를 그리는 모두는 안타깝다는 말을 남긴다. 나는 얼마나 아깝고 아름다웠는지 몰랐던 소나무다. 지금도 선유도를 찾으면 소나무는 모습을 감췄지만 펑사낙안은 눈을 떼지 못한다. 또한 월영단풍은 가을이면 신시도를 단풍으로 장식을 하지만 그보다는 월영봉 정상에는 최치원 선생이 글을 읽었다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넓은 돌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5-6번 다녀왔으며 정상에서는 고군산군도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금의 고군산 군도는 육지가 되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어 주말이면 차량 행렬이 붐빈다. 육지가 된 것은 군산에서 부안군을 연결하는 새만금사업으로 제방이 건설되면서 섬끼리의 교량공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 아닌 육지가 된 고군산군도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감개무량함도 있지만 그 보다는 여객선을 이용한 추억의 잔영이 아른거림은 더 한다. 오늘의 새만금이 만들어진 것은 필자가 전북일보 기자시절인 1978년부터 우리나라 국토확장과 식량안보차원에서 서해안에 대단위간척사업을 벌이자는 정책기사를 써댔다. 결국 중앙정부가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 1988년 제13대 노태우대통령후보의 공약사업발표로 1991년 11월에 오늘의 새만금사업 기공식이 있었다. 나는 전라북도 의회 의장자격으로 테이프커팅을 했다. 오늘도 새만금을 생각하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여서 고군산군도를 찾을 때면 항상 가슴 벅찬 감개무량함이 나를 외워 싼다. 오늘도 푸른 수평선이 넘실거리는 선유도 해수욕장과 해당화를 보고 왔다. 끝없는 수평선과 함께 때로는 넘나드는 물결을 벗삼은 선유도 해수욕장은 오늘도 고군산군도를 지킨다. 청춘남녀는 달빛을 품으며 백사장에 사랑의 발자국을 남긴다.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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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1 14:07

눈으로 말하기와 경청하기

나태주 시인 이제 우리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바깥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자기 집 문밖을 나서는 순간 그 무엇보다 먼저 챙겨야 할 물건이 마스크다. 마스크 착용 없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고 공공장소는 물론 공원이나 예식장, 헬스클럽조차 드나들기 어렵게 됐다. 심지어 가게나 식당에 갈 때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안된다. 이제 마스크는 생활필수품이 돼버린 지 오래다. 오죽하면 속옷 없이는 살아도 마스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다 나왔을까. 그런데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니 언뜻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고 대화하기도 힘들다. 더러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싶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특히 마스크를 쓴 여성분들은 이쪽에서 헤아려 알기가 쉽지 않다. 마스크가 입술과 코를 비롯한 얼굴 아랫부분을 모두 가리는 바람에 이마와 눈썹과 눈만 빼꼼히 나와 있는 모습으로는 상대방의 특징이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도무지 누구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눈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마스크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의사소통에 있어 입술과 볼의 기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만, 입술의 움직임이나 볼의 움직임으로 먼저 상대방의 의중을 짚어 알게도 된다. 그런데 그 입술과 볼이 가려진 형편이니 답답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간에게 눈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 말이다. 눈이야말로 마음의 창이다. 영혼의 거울이다. 마음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얼굴의 기관이 바로 눈이다. 마스크 차림으로 사람들과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전보다 훨씬 밀도 있는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도 실은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역작용으로의 효능이다. 더러 젊은 여자분들 말을 들어보면 마스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얼굴 화장을 하더라도 윗부분만 하게 돼 오히려 편해졌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래선지 여자분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스크 벗기를 꺼리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 또한 마스크가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풍조 가운데 하나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사람이 살아서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이것뿐/ 나는 지금도 술잔에 입술을 대고/ 그대를 바라보며 눈물 글썽이고 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외우는 시로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술 노래라는 작품이다. 글의 제목은 술 노래지만 글의 내용은 사랑이다. 마스크를 쓰면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새삼 이런 시가 가까이 다가오는 요즘이다. 더하여, 최근 우리에게 생긴 것은 경청의 문화다. 경청이란 글자의 뜻 그대로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래도 예전에는 경청하는 문화가 있었다. 어른이 말하든 아이가 말하든 누군가 말을 하면 귀를 기울여 정성껏 들었고 또 거기에 정성껏 반응했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지고 피차간 하는 일이 바빠지다 보니 이야기할 때도 상대방의 말에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조심스럽게 말해주는 대화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수월찮게 소원해지고 데면데면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사는 날들이 지속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경청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하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 해도 문학강연에 가서 독자들이 책을 들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할 때 그 이름을 물어 적어주는데 경청이란 것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을 잘못 쓸 때는 저쪽도 불편하고 이쪽도 민망한 일이 된다. 그래서 아예 복사지를 하나 준비해서 거기에 이름을 적어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가 코로나19 이후 마스크 쓰기를 하면서 새롭게 생긴 삶의 형태, 문화 풍조다. 그렇다. 이참에 우리도 이런 것들을 새롭게 익히면서 조금쯤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됐으면 싶다. 코로나 19가 우리의 삶의 형태를 바꿔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좋은 쪽으로도 바꿔놓았노라 자위 아닌 자위를 해보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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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7 17:54

삶은 선택이다

▲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성경의 마가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5000여 명의 무리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과 논쟁보다는 그 자체 상황에 주목해보자. 일단 당시 상황을 보면 네 종류의 주체가 등장하는데, 예수와 제자들, 5000여 명으로 표현되는 성인 남성들, 그리고 무리 속에 있었지만 기록되지 못한 여성과 아이들이 그들이다. 무엇보다 이 주체를 바라보는 예수와 제자들의 시선이 다르다. 제자들은 본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예수와 모인 무리들의 관계로 바라본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36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예수와 무리의 관계가 있을 뿐, 예수와 제자의 관계, 제자와 무리의 관계는 빠져 있다.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항상 제자의 역할, 제자의 길을 강조한 것은 이유가 있다. 본인이 모든 일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일을 하도록 한다. 제자들은 선택하지 않았다. 빈 들에 모인 배고픈 무리들의 현실을 자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상황을 회피한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럼에도 제자들은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퇴로는 없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 후에 나온 결과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는 대답이다. 비로소 제자들은 무리의 굶주림과 결속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선택을 강요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을 지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모든 것을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성경 본문에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빈 들과 날이 저문 것은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이자 조건이다. 예수는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빈 들이니까 속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저물었으니 흩어져 집으로 가야 한다는 제자들의 말을 뒤집는다.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한없이 오만하여 맘대로 살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체념 속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가 지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구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진 다음에, 바람이 불 때, 비가 내릴 때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정작 바람을 멈추게 하려는 이들은 바람이 불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걸 막으려고 했던 이들은 정작 비가 내리면 나 몰라라 한다.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 날이 저문 시각에 빈 들에 서 있다. 이곳이 갑자기 아름다운 숲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고 태양이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은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삶은 선택이다. 선택은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선택하는 삶이야말로 개인을 존중한다. 계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다섯 살 아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없는 삶이 늘어가는 시대에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권리보다는 책임에 가까운 것은 아닐지. 다섯 살 아이에게는 삶이나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그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인해 죽었다. 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선택의 순간을 가졌든 아니든 간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니까. 나아가려면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려면 맞서야 하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사계절, 165쪽)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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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0 17:00

동결, 감축, 폐기의 3단계 접근이 현실적이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예고된 대로 바이든 신 행정부는 확실히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민주당 행정부가 그래왔듯이 바이든 차기 행정부도 명분과 원칙을 존중하고 동맹 강화와 다자적 접근을 통한 대외전략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국제질서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해 온 토니 블링큰을 첫 국무장관에 지명한 것은 그가 클린턴 정부시절부터 오바마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깊이 관여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그의 대북관은 상당히 원칙론적이다. 바이든 당선자가 김정은 위원장을 불량배라고 부른 것과 같이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도 폭군이라고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비핵화 협상을 벌여왔다고 비난했다. 그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포괄적행동계획(JCPOA)이라는 이란 핵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관여한 바 있다. 북핵문제도 트럼프식의 톱-다운 방식이 아닌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실무적인 부분부터 꼼꼼히 따져나가는 바텀-업 방식의 협상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북아 정세에 있어 한ㆍ미ㆍ일 3자 협력구조를 탄탄히 하여 북한을 후원하고 있는 중국을 압박하고 북한이 핵포기 의사를 명확히 밝히기 전까지는 대북제재를 지속 유지해 나갈 것으로 판단한다. 한 인터뷰에서 동맹국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쥐어짜야 하며 경제적 압박을 위해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그의 접근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실 오바마 행정부 시절과 거의 유사하다. 바이든 당선인이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이었고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오바마 행정부시절 백악관 참모였기 때문에 큰 틀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원칙외교, 다자협력 외교를 통해 초국가적 안보문제에 대한 협력을 이끌었고 이란, 쿠바, 미얀마 등 적대 국가들과도 관여정책을 통해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초기 과감한 접근을 시도하려 했으나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로 인해 오바마 행정부는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물론 북미간 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시키고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 식으로 하여 2.29 합의를 도출하였지만 이 역시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로 좌초되고 말았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략적 인내로 회귀했고 중국을 압박하여 북한이 협상장으로 나오도록 했으나 이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핵 위기의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 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북핵 협상과 관련하여 지나온 역사를 리뷰해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대부분의 북핵 위기가 우리와 미국의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과도기의 틈을 활용하여 북한은 핵능력을 강화해 왔고 결국 이에 대한 대응은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귀결되었다. 강경한 대북정책은 도발-보상-파기의 악순환을 형성하면서 다시 북한의 핵능력 강화를 초래하는 패턴을 반복시켜 왔다. 바이든 신 행정부와 블링큰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오바마 행정부와 같이 대북제재를 유지하는 가운데 북핵 불용의 입장에서 원칙적인 대응을 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북한이 오판하여 또다시 핵미사일 도발을 감행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바이든 신 행정부도 오바마 행정부와 같이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협상장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간 북미간 합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한반도는 다시 북핵위기의 긴장과 위협속에 격랑으로 표류할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북한의 핵능력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기간 동안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을 선언하였다. 과거와 같이 불완전한 핵능력을 가지고 핵능력의 모호성을 유지한 채 살리미 전술을 통해 딜을 하려는 시기는 지났다. 북한의 핵위협은 훨씬 강화되고 현실화되었다. 바이든 신 행정부는 북한을 방치하는 것이 아닌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전략과 입장을 반영하여 신속하게 북핵협상에 나서야 한다. 동결-감축-폐기에 이르는 3단계에 맞는 상응조치를 추진함으로써 단계적으로 북한 핵폐기를 유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과거와 같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여러모로 우리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방위적 외교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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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6 17:51

다시 좋은 세월이 오면

나태주 시인 최근 코로나 대란으로 우리의 삶은 많이 제한적이다. 예전에 일상적으로 편안하게 하던 일들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모여서 식사를 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조차 편안하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보는 일도 쉽지 않고 대단위 회의나 축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외국 여행이다. 가끔 여행 가방을 들고 인천 영종도 공항을 거쳐 외국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우리들 삶의 에너지를 보충해주고 지루한 일상을 새롭게 싱싱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아주아주 막혀버린 것이다. 나는 외부 나들이가 잦아 공주 시외버스 터미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다. 이것도 코로나 이후에 일어난 변화인데 시외버스 시간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매표구 앞에 걸려있는 시간표를 보면 검은색으로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그것이 모두 버스 노선을 줄인 증거다. 아예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표는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아예 공주에서는 인천공항으로는 버스가 한 대도 가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 그만큼 비행기가 안 뜬다는 얘기다. 그러니 관광업이든 숙박업이든 제대로 되겠는가. 이제는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 대란이 평정돼 예전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외국 여행 한 번쯤 다녀오는 것 말이다. 만약 나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겨 다시금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스페인을 들고 싶다. 그냥 멀리서 생각할 때는 투우의 나라, 집시의 나라, 피카소의 고국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정작 가보니 스페인이야말로 자연이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햇빛이 다르고 바람이 달랐다.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 자유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똘레도가 가장 좋았다. 내가 똘레도를 찾은 것은 오후의 시간 한나절. 똘레도의 골목과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며 기분이 좋았다. 발길이 허뚱허뚱 허공을 딛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에서나 미국 세도나에서 느꼈던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저녁 식사시간. 여행사 직원이 준비한 식당이 그럴듯했다. 포도주와 애저꼬치뇨 요리가 메뉴였다. 애저는 애기돼지를 이르는 말이고 꼬치뇨는 돼지 통구이의 스페인 말이란다. 이른바 새끼돼지 바비큐. 돼지 다리 하나씩을 줬다. 조그맣고 먹음직스러웠으나 나는 차마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애기돼지를 죽여 바비큐로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나는 내 차례로 온 바비큐를 다른 사람에게 밀어주고 대충 요기를 한 다음, 음식점 밖으로 나와 한동안 서성였다. 골목길이 아주 좁았다. 그 길을 사각형 조그만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빠져 다녔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길가에 만들어놓은 턱에 올라가 자동차를 피했다. 자동차들도 조심조심 지나갔다. 그럴뿐더러 거리의 불빛이 매우 흐렸다. 어른어른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애상적이고 환상적이었다 그럴까. 어디선가 문득 카르멘의 후예인 예쁘고 젊은 아가씨가 불쑥 나타나 나에게 웃어줄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길거리에 버려진 돌멩이처럼 멍하니 서서 울먹이고 있었다. 울먹임. 까닭도 없는 울먹임. 울먹임 그 자체의 울먹임. 그런 애상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골목길을 저만큼 걸어 낯선 가게를 하나 발견하고 불쑥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플라멩코 춤을 추는 집시 아가씨 인형을 두 개 사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 안 될 것 같은 목마름이 그때 있었다. 아, 다시금 좋은 세월이 오면 스페인이란 나라에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도 좋고 프라도 미술관도 좋고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도 좋고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은 더욱 좋았지만, 그 어디보다도 똘레도에 한 번만 더 가보고 싶다. 몬주익 언덕에서는 황영조 선수의 조각상을 보기도 했었지! 하루만 똘레도의 골목길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성성이고 싶다. 낯선 가게, 낯선 음식 앞을 기웃거리며 걷고 싶다. 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 것인지! 어쩌면 이것은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닐 것이다. 하도 지루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날이 계속되다 보니 내가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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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9 17:48

백넘버 51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취미로 야구를 시작했다. 공을 좋아해서 축구와 농구, 당구, 족구,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했지만, 야구는 주로 시청하는 것에 만족했던 종목이다. 운동 역시 자신과 맞는 것이 있어서인지 주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야구라는 스포츠는 직접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야구 경기라는 것을 해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투수로 나서 완투했던 기억인데, 경기 후 한동안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번에 야구를 시작한 데에는 건강관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경기 안 되었지만 현재까지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타율도 아직은 좋은 편이다. 직접 선수로 뛰면서 느낀 것은 그 동안 야구라는 스포츠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다. 흔히 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야구 선수들은 거의 뛰지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 식으로 약간의 조소가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야구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체력을 요하진 않지만 매우 섬세한 집중력을 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비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나 공을 잡고 던지는 것, 심지어 주루를 할 때 베이스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하거나 부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격을 하는 것도 투수가 던진 공을 배트 중심에 맞춘다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엇보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축구는 한 두 사람이 잘 못 뛰거나 실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축구 경기에 퇴장을 뜻하는 레드 카드가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야구 경기는 9명의 선수가 수비와 공격에서 자신의 자리와 타석에서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수비에서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날아오는 공을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타석에 들어서서도 투수의 공을 보고 치는 것은 자신만의 몫이다. 물론 투수의 비중이 절대적이고 소위 강타자의 역할이 큰 것은 맞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퍼즐을 맞추듯이 모여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야구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각자 다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배치가 가능하다. 투수와 포수, 내야수와 외야수 등 각자의 포지션에 따라 다른 역량이 요구된다. 유격수처럼 순발력과 강한 어깨가 더 요구되는 포지션이 있는가 하면, 1루수처첨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많지 않은 자리도 있다. 타선 역시 1번부터 9번까지 나름의 배치와 그 이유가 존재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야구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야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세 명이 아웃되지 않으면 이닝이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 끝이 난다. 후반전에는 힘이 있는 선수가 더 많이 뛰어 경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각 선수가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도 그 끝을 알 수 없다. 어려운 순간이나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집중하고 걸어갈 때에야 공격과 수비가 교체되듯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유니폼 뒤에 새겨진 백넘버는 51번이다. 첫째 아이라 51세에 야구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정해 주었다. 지금은 신발과 헬멧 외에 글러브와 배트 등 대부분을 빌려 쓰고 있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축구나 농구를 할 때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다. 내가 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답답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역할을 생각하고,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부족한 것들이다. /권경우(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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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2 20:09

역사왜곡, 동북아 냉전, 그리고 우리는?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의 정치학자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비추는 현재의 거울인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최근 625 전쟁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언급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625 참전 70주년 연설에서 625 전쟁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의 침략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항미원조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중국 지도자의 언급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625 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5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의 사상자를 낸 한국 역사상 가장 슬픈 전쟁이다. 북한의 남침이라는 객관적 역사의 증거 앞에서는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 자체도 남침에 의한 전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 있음에도 이를 다르게 기술하는 역사의 왜곡 현상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역사의 왜곡 현상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논란을 가져오고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식민주의 시절 본인들이 자행한 많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후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터무니없이 주장하고 있으며 위안부ㆍ강제징용 등 과거사에 대해서 통렬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 역시 동북공정 등을 통해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지역의 역사를 왜곡해 왔다. 최근 강조하는 중국몽을 통해 중화민족주의의 부활을 위한 역사왜곡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현상이 동북아시아에서 유독 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의 잔재를 청산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냉전의 여파와 현재까지도 그 냉전적 질서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데 연유한다. 2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였던 유럽이 유럽 공동체로 발전한 것을 보면 참 대조적인 현상이다. 유럽의 경우 냉전기간 중 역사와의 과감한 화해를 시도하였다.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역사의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은 석탄철강공동체 형성을 시작으로 정치 공동체까지 일구어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는 통절하게 사죄를 구하고 또 그 반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볼 때 역사를 대하는 유럽인들의 통찰력은 가히 본 받을만하다. 동북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이다. 남북이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세계 1, 2위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세력다툼은 점입가경 수준이다. 대선 기간 중인 미국은 중국 때리기를 통해 미국인들의 결속을 호소하고 있고 중국은 이러한 공세에 밀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70년 전 항미원조 전쟁이 지금 다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시 중국 참전의 명분이면서 현재 중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침략자를 때려눕혀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줬다. 주권, 안전, 발전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 인민은 정면으로 통렬한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중국 역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미항전을 통해 정치적 체제결속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는 우리는 매우 불편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되거나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어도 미중 갈등이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다. 문제는 이러한 미중갈등이 동북아시아의 신냉전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미일 대(對) 북중러 구도가 고착될 가능성이 높으며 한반도의 분단선은 과거 유럽 동서냉전의 철의 장막처럼 견고한 미중 대립의 마지노선으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놓여있는 우리는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요구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남북관계마저 한미관계와 북중관계 속의 틀에 갇혀 표류하게 된다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전진도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로서는 강대국들의 역사왜곡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 뿐 아니라 미중갈등 속에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남북관계가 주도적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구조적인 틀을 제공할 것이나 주변 강대국의 집요한 편가르기와 북한의 잘못된 선택, 우리 국민들의 분열 등이 중첩되면 매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여야가 힘을 모으고 국민들이 정부 정책을 튼튼하게 지지해 주어야 한다. 그 것이 문제해결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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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9 19:41

근근이 먹고산다 -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해 근근이 먹고 산다. 지금도 이 문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온다. 이 문장은 우리 집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다닐 때 여름방학 숙제로 쓴 일기장에 들어 있던 문장이다. 마침 그때는 나도 아들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시절인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여름방학 숙제 검사를 하던 아들아이 담임선생님이 일부러 나를 불러서 보여준 문장이기도 하다. 아들아이가 일기장에 쓰기는 했지만 이 말은 애당초 아들아이의 것이 아니다. 아이의 엄마가 아들아이에게 자주 해준 말이다. 그러기에 아이가 그것을 외워두었다가 마침 일기장에 아무것도 쓸 거리가 없는 날 이 말을 기억해내고 무심히 옮겨 적은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 아주 작은 단독주택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홍가가게라고 부르던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아이는 그 장난감들에 눈독 들여 살았다. 들락날락 가게 문을 드나들며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장난감을 넉넉하게 사줄 만한 돈이 아내에게 있을 까닭이 없었을 터. 늘 푼돈으로 쪼개어 써도 돈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쌀값, 연탄값, 반찬값을 제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새로운 장난감에 마음을 뺏기고 자꾸만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으리라. 그럴 때마다 아내가 아이의 등짝을 한 대씩 때리면서 했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하여 근근이 먹고산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나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경각심을 심어주던 아이의 엄마나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참으로 한심한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한심한 사람은 바로 나. 그래, 학교 선생으로 일한다는 사람이 아이에게 장난감 하나 시원시원 사주지 못하고 아내에게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들고 또 아이에게는 그걸 또 일기장에 쓰게 했단 말인가! 이제 와서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고 송구한 심정이다. 근근이란 말은 일상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어렵사리 겨우란 뜻의 부사이다. 또 이 말은 한자에 그 뿌리를 둔 말이기도 하다. 근근이에 쓰여지는 근(僅)이란 글자는 여러 가지 뜻인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며 마이너의 뜻이다. 겨우, 거의, 가까스로, 다만, 단지(但只), 희미하게(稀微--), 적게의 뜻이 그것들이다. 정말로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삶이 그러했다. 매우 왜소하고 매우 부족하고 매우 썰렁하고 매우 춥게 살던 시절이다.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형편이나 상황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근근이 어렵게 사는 삶이다. 시간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고 인간관계가 그렇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두루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단군 임금 이래 가장 잘 사는 세상을 살고 있다. 들쑥날쑥이 있기야 하겠지만 의식주가 그런대로 해결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한껏 보장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이런 나의 발언이 선뜻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나잇살이나 먹은 내 눈으로 보기엔 우리는 지금 분명히 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냥이 아니라 기적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고 자기만 낙오자라고 투덜거린다. 마이너라고 루저라고 한숨을 짓는다. 모두가 상대적 비교 탓이다.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것만 흘낏거린 탓이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자기의 것을 소중히 아름답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높여야 할 일이다. 근근이 먹고 산다는 이 말을 우리는 지나치게 부끄럽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상 우리는 모두 오늘날도 여전히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안쓰럽고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람들이다. 비록 근근이 먹고 살지만 마음만은 더욱 너그럽게 부드럽게 풍부하게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길이 정말로 물질로 마냥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가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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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2 15:50

체념과 희망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 동안 삶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단어들이 훅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주름, 흰머리, 뱃살, 노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이 주로 외모나 신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실패와 좌절, 절망, 불안, 우울 등은 심리적이고 정서적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체념이라는 단어 역시 그 중 하나다. 실패나 좌절이 더 깊고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체념은 기대를 접는 데 있어서 뭔가 순간적 감정이나 판단 등 일시적 느낌으로 남는 듯하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라고 썼다. 칼 폴라니는 죽음이라는 좀 더 궁극적인 절망 앞에서 체념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은 일상의 다양한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시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체념 사이에서 흘러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던 꿈은 이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체념의 숫자를 늘려가는 중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수많은 체념으로 구성된다. 동그란 공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거의 좋아했다. 잘한다는 말도 꽤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내 몸은 과거의 몸이 아니다. 초등학교 운동회때 부모들이 이어달리기에서 많이 넘어지는 이유도 머리가 과거의 몸을 기억하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제 조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체념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내 몸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체념과 포기는 다르다. 체념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시간에 따른 판단 행위를 뜻한다면, 포기는 미래를 포함한 시간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다. 그런 점에서 체념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체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체념 이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체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체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거나 발견하기도 한다. 체념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체념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한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상상,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절망과 죽음이라는 극단의 비극에서 비로소 희망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살면서 더 필요한 일은 수많은 체념 속에서 희망을 엿보는 일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라는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빠져 있다네. 하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사실, 언제나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희망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은 항상 시궁창 같은 현실에 절망했고 좌절했다. 그 속에서 체념은 지극히 당연한 대다수의 선택이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체념 가운데 별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궁창에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시궁창 안에서도 탐욕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기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다고 말을 해주어야 한다. 칼 폴라니가 말한 죽음이라는 현실을 기초로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것은 어쩌면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현실적인 노력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온통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방법만 강조할 때, 누군가는 저기 사람이 살고 있다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체념 가운데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권경우(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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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5 17:43

종전선언은 다시 추진되어야 한다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종전선언은 법적 용어는 아니다. 대립되는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전쟁을 종결하자고 합의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다만 일방 당사자가 또다시 전쟁을 걸고 들면 이 선언은 파기될 수밖에 없다.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아직 정전협정 체제이다. 70년전 625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휴전협정 상태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남과 북, 주변국들이 보는 휴전상태, 정전체제를 보는 시각은 각기 다르다. 북한은 탈냉전이후 1990년대 들어 흡수통일의 불안감 등으로 정전협정 체제의 무력화 조치를 시행해 왔다. 정전협정 이행의 중요한 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등을 차례로 무력화시키고 북-미 사이에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라도 새로운 평화보장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면서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조미 군사기구를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이며 따라서 자신들과 미국이 주체가 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과 중국은 어떤가? 이들의 대한반도 정책, 정전협정을 보는 시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 전쟁과 냉전, 그 이후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열세에 처한 남한을 돕기 위해 미국이 참전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한반도가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북한을 돕기 위해 중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했고 중국은 이른바 항미원조 즉 미국의 대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하였다. 20세기 동서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625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냉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는 한반도의 분단선은 주변 강대국들의 지역 패권의 임계철선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지난 70년간의 동북아 질서를 완전히 전환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과 동서 냉전을 거치면서 사분오열한 유럽국가들은 냉전체제를 극복하고 하나의 유럽연합 체제로 전환하였다. 유럽 연합 회원국들간 경계와 철조망을 없애고 화폐와 관세도 통합하였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자유롭고 군사적인 적대행위가 종식되었다. 유럽은 하나의 거대한 평화체제인 셈이다. 유럽의 역사만큼 역사의 상호작용이 심했던 동북아시아에서 유럽연합과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냉전체제가 남아있는 한반도만이라도 정전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평화체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상호간 위협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시키고 비핵화를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이 중심이 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입장 하에 노력해왔다. 그리고 남북관계뿐 아니라 북미관계의 개선을 위해 북미간 비핵화 협상의 전개를 측면에서 지원해 왔다. 지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우리 정부가 노력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안전보장을 교환한 싱가포르 북미 합의도 커다란 진전이 있었지만 당시 종전선언을 도출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 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오랜 분단구조 하에 상호 신뢰가 부족한 한반도 상황에서는 평화체제의 시작점으로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종전선언 당사국들간의 정치적 의무, 국제적인 책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923(한국시간) 유엔총회 연설에서 문대통령은 종전선언 추진을 다시 제기하였다. 종전선언은 지난 1,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북미간에 논의를 한 바 있고 북미 모두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대선일정, 북한의 고립적인 대외전략 등을 감안할 때 북미관계에서 커다란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을 제안한 이유는 하노이 회담 결렬이후 북미협상의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창건 75주년, 미국 대선 등 굵직한 정치행사로 인한 동북아 정세의 가변성을 감안한 제안으로 해석된다.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대화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줬다고 본다. 비핵화 협상이 북미구도로 흐를 경우 우리측이 소외될 수 있다는 점, 종전선언을 통해 남북미 구도로 협상을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인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노이 회담이후 2년 가까이 되도록 북미간 실질적인 비핵화 협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종전선언은 향후 비핵화 협상을 추동하는 중요한 기제로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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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4 16:10

사람 나이 50쯤이면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사람이 나이 50살쯤이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자님은 사람의 나이 50을 일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셨다. 지천명이라? 공자님 당신께서 50 나이에 이르러 하늘의 명령, 하늘이 뜻을 헤아려 알게 됐다는 말씀이다. 글쎄. 보통 인간들도 50쯤 나이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까? 어림없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오직 공자님이니까 그렇게 아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대놓고 자기 나이가 50이 됐으니 지천명의 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발 가운데 망발이다. 나이 50과 관련지어 생각나는 사람은 또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50세 이전까지는 아주 자유롭게 호기롭게 산 사람이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것은 모두 누리며 산 사람이었다. 건강과 돈과 명예와 사랑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모든 일을 가능한 일로 알고 살았던 톨스토이. 그는 50세에 이르러 자신의 인생을 스톱시켜 놓고 회심(回心)의 기회를 갖고 통렬히 반성하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 살았다 한다. 지금까지 산 인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 인생이었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이었다. 비로소 자기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면서 자기가 얻은 재화를 자기가 아닌 타인,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32년. 참으로 장한 인생이고 보통 사람은 꿈꾸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운 인생이다. 인도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인생을 경영했을까? 인도의 힌두교에는 인생 4단계론이 있는데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50세를 넘어 75세까지를 임서기(林棲期), 75세가 넘으면 유랑기(流浪期)라 한다고 한다. 참 특별한 인생 경영이다. 어쨌든 인생살이에서 50살은 매우 중요한 나이이고 계기로 보인다. 50살이 돼 무언가 이전의 삶과 다르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보살핌이 있고 신의 도움이 큰 사람, 행운의 사람이라 하겠다. 나의 생각은 그렇다. 사람이 비록 50살이 돼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 지어 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언가는 좀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노력, 자기 삶의 족적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유소년기에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가족이 생기고 이웃이 생긴 뒤로는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아 늙은 사람이 된다. 필경 그가 늙은 사람이 돼 신의 축복을 받고 선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시간이 허락되리라고 본다. 누군가의 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 독립된 한 개체로 살아가는 기간이 열리리라고 본다. 더욱 좋은 축복이 있고 신의 선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다시금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삶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 안에서 늙은 사람이 된 것이다. 늙은 사람이 된 것도 커다란 은혜입음이다. 그러므로 갚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눔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내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식을 나누고 내가 재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들을 나눠야 한다. 그것만이 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누게 되면 늙은 사람의 한탄과 고독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늙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젊은이 흉내를 내는 일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만족이 있어야 한다. 유지하려고 해야 하지 확장하려고 해서는 낭패다. 진정 그렇게 사는 것이 늙은 사람의 삶이고 또 그것이 늙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는 좋은 길이다. 요즘 인생은 60부터다, 70부터다 하는 말은 지나친 억지다. 거짓말이다. 속지 말고 속이지 말 일이다. 나는 70살이 넘어서 조금이라도 타인을 생각하면서 사는 삶을 알게 돼서 매우 기쁘다. /나태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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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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