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나는 빤히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액정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달에 소설을 한 편 이상 읽는 독자라면 그 이름 석 자만은 익히 알 것 같은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이 두 개의 문장에는 어떤 공통점이 들어 있는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의 거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문장에서 부사어는 다른 부사어나 용언을 꾸미고, 관형어는 체언을 꾸며준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강물’ 같은 문장이 그걸 한눈에 보여준다. 부사어 ‘아주’는 다른 부사어 ‘느리게’를, ‘느리게’는 용언인 ‘흐르는’을, 관형어 ‘흐르는’은 체언인 ‘강물’을 꾸미고 있다. 이 구절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까닭은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을 가깝게 두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첫 문장의 ‘빤히’가 꾸미는 말은 ‘바라보았다’일 것이고, ‘열심히’는 ‘응시하고’를 꾸민다. 그 둘 사이를 다른 몇 개의 단어가 가로막고 있어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액정 모니터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와 같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술에 취하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잠든 초롱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다.’라고 쓴 문장은 어떤가. 마치 초롱이라는 아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면서 잠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갖게 한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는 말이다.’라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국민이라도 그 이름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어느 소설가의 단편소설에는 또 이런 게 있었다. ‘그는 유심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왼손은 얌전히 욕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 두 문장의 부사어 ‘유심히’, ‘얌전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그림 속의 ‘…일제히 헌재의 결정을 환영하며…’의 경우 부사어 ‘일제히’ 역시 ‘환영하며’를 꾸미고 있으므로 ‘…헌재의 결정을 일제히 환영하며…’라고 써야지 싶은 것이다.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바르게’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게’라고 나와 있다. ‘삐딱하지 않게’가 ‘바르게’다. ‘바르게 살자’는 ‘삐딱하지 않게 살자’는 뜻일 게다. ‘바르게 살자’라는 두 어절의 문장을 새긴 바윗돌을 전국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진실’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잘 지켜서 모두모두 ‘화합’하며 살아가자는 말까지 그 아래 또박또박 덧붙여 놓았다. 구구절절 바른 말이다. 세상에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말을 비석에까지 새겼을까 싶다. 그런데 거기 적힌 ‘바르게 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우리말을 웬만큼 구사할 줄 아는 어느 외국인이 부근을 지나다가 돌에 새겨진 말을 발견하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게 살지 않으면 이런 말을 이렇게 써 놓았을까. 하긴 일리가 없지는 않아….’ 한겨울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마다 광화문을 밝힌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바라본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맞아. 바르게 살아야 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여기서 이 말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어? 얘들아, 너희들도 여기에 적힌 것 좀 읽어 봐라. 어때? 참 좋은 말이지? 앞으로는 엄마하고 아빠도 바르게 살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희들도 이걸 꼭 실천해야 한다, 알겠지?” 이렇게 깨닫고 실천 의지를 굳건히 다질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이토록 큼직한 돌을 세우고 ‘바르게 살자’고 적어 넣어서 이 땅의 수많은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이들은 또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때 ‘공주’로 떠받들어졌던 ‘그분’ 또한 이런 비석을 청와대 관저 앞마당에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바르게 살자’를 맘속에 새겼더라면 뭐가 좀 달라지긴 했을까. 문득 오래 전에 어느 드라마를 통해서 유행했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너나 잘 하세요.”라고 했던….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피의 대가, 반드시 치를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레버넌트’라는 영화의 포스터에서 발견한 문구다. 거기 적힌 ‘대가’라는 말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대가(代價)’일까, 아니면 ‘대가(大家)’일까해서다. 물론 이어진 말로 미루어 ‘대가(代價)’라는 건 짐작이 갔다. 그렇더라도 ‘댓가’라고 적을 수 있었더라면 좀 좋을까 싶었다. 사이시옷은 순우리말에 쓴다.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결합된 경우에도 덧댄다. ‘빗물’과 ‘처갓집’ 같은 게 그런 예다. 한자말의 경우는 어떤가.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곳간(庫間), 셋방(貰房), 숫자(數字), 찻간(車間), 툇간(退間), 횟수(回數) 여섯 개 단어는 사이시옷을 반드시 적어야 옳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생선회를 파는 식당은 ‘횟집’과 ‘회집’ 중 어느 것이 옳겠는가? ‘횟집’이다. ‘회(膾)’는 한자어지만 ‘집’이 순우리말이어서 그렇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 ‘횟집’ 메뉴판에 가격 대신 ‘싯가’라고 적힌 걸 본 적 있을 것이다. 그 ‘싯가’는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 ‘시가(市價)’가 맞다. 까닭은 뻔하다. 앞서 본 한자말 여섯 개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꾸 떼를 쓰고 싶어진다. 이걸 곧이곧대로 ‘시가’라고 ‘우아하게’ 말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 ‘싣까’ 아니면 ‘시까’라고 말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데도 읽거나 말할 때는 ‘싣까’든 ‘시까’든 상관이 없지만, 쓸 때는 ‘시가’가 맞춤법에 맞는 말이라니 도리가 없다. 흔히들 쓰는 ‘시가(媤家)’하고 소리가 같아서 헛갈리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앞서의 여섯 개 한자말에만 사이시옷을 쓸 수 있다고 정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가(大家)’와 구분하는 뜻으로 ‘댓가(代價)’를 표준어로 인정할 수는 없는가. ‘시가(媤家)’와 ‘싯가(市價)’를 나누도록 표준어 규정을 손봐서 다들 ‘댓가’와 ‘싯가’를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해주면 좀 좋을까 싶은 것이다.
우리말에서 일부 명사 앞에 붙이는 ‘잡(雜)’은 ‘뒤섞이거나 자질구레하다’는 뜻으로 쓰여 잡것, 잡귀신, 잡생각, 잡소리, 잡소문, 잡탕 같은 말을 만들어낸다. 개[犬]의 품격을 구분하는 데도 이 ‘잡’은 대단히 유용하고 효과적이다. ‘순종’과 ‘잡종’이 그것이다. 같은 개라도 순종은 모시고 살고, 잡종은 대충 먹여서 키우다 잡는다. 복날 패서 ‘잡’으니까 ‘잡’종인가? 전라도 민요 <새타령>의 첫머리에도 ‘잡새’가 등장한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중에는 봉황새…’ 노래 속에서 ‘잡새’는 ‘봉황새’와 정반대로 취급된다. 이 ‘잡새’는 지난 시절 대학 캠퍼스를 요즘말로 ‘보안손님’처럼 들락거렸던 ‘짭새’의 어원일 것이다. ‘잡’을 접두사로 쓰는 말 중에는 ‘잡상인’도 있다. 사전에는 ‘일정한 가게가 없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팔고 다니는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적혀 있다. 인도나 지하도에 좌판을 벌이는 노점상, 과일이나 채소를 작은 트럭에 싣고 아파트 단지를 찾아다니는 농부, 생활용품이 담긴 크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하철을 누비는 청년, 밤늦은 시각까지 선술집을 순회하면서 떡을 파는 할머니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잡상인일 것이다. 과연 그들은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팔고 다니는 ‘잡스러운’ 상인들인가. 번거롭게 마트까지 가지 않고도 값싸고 질 좋은 과일을 사먹을 수 있는 서민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요긴한 존재일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남 등쳐먹지 않고 정직하게 땀흘려가며 생계를 유지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가는 수많은 ‘잡상인’들에게 ‘雜’은 또 얼마나 소중한 ‘job’일까. ‘잡(雜)’은 막돼먹은 사람을 일컫는 데도 쓴다. ‘잡년’과 ‘잡놈’이 그런 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잡상인’은 따로 있지 싶다. 최근 몇 달 동안 TV 뉴스의 중심을 차지해서 보는 이들의 속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든 ‘그 여자들’과 ‘그 남자들’이야말로 진짜 잡상인일 것이다. 어느 사무실 출입문에서 발견한 ‘잡상인의 출입을 금합니다’를 읽고 조목조목 떠오른 생각이다.
우리말의 대략 70%는 한자어다. ‘사랑하다’, ‘귀엽다’, ‘바쁘다’ 같은 용언은 순우리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시나브로’ 같은 부사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체언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책상(冊床)’, ‘화분(花盆)’, ‘자동차(自動車)’ 등은 순우리말처럼 여겨져도 본디는 한자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순우리말’의 ‘순(純)’도 한자어다.) 한자어는 크게 두 가지다.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거나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 그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게 불가능하거나 우리말처럼 쓰고 있으니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말이다.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한자어는 대부분 어렵거나 낯설다. 반대의 경우는 그야말로 순우리말처럼 쓰인다. ‘본 장소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의 무단 투기 행위를 금합니다.’를 보자. 이 문장에 쓰인 ‘연탄(煉炭)’이나 ‘음식물(飮食物)’의 경우는 본디 한자말이지만 순우리말처럼 쓰인다. 다른 말로 바꾸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본(本) 장소(場所)’는 ‘이곳’, ‘무단(無斷)’은 ‘함부로’, ‘투기(投棄) 행위(行爲)’는 ‘함부로 버리기’, ‘금(禁)합니다’는 ‘마십시오’와 같은 순우리말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 앞서 보았던 문장을 ‘이곳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오.’와 같은 식으로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필히 허락을 득한 연후에 입실하십시오.’와 같은 문장은 숫제 ‘기미독립선언서’와 거의 동급이다. ‘허락(許諾)’은 순우리말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필(必)히’, ‘득(得)’, ‘연후(然後)’, ‘입실(入室)’은 다르다. ‘반드시 허락은 받은 다음에 들어가십시오.’라고 쓸 수 있다. 그림처럼 ‘반입금지’니 ‘미착용시’ 같은 한자어도 즐겨 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가방끈이 긴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서일까. 작고하신 박동진 명창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아주 오래된 광고 카피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돼지갈비가 겁나게 싸고 맛있는 집’은 어느 음식점 간판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여기에 쓰인 ‘겁나게’의 ‘겁나다’는 ‘무서워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 ‘겁(怯)’에 ‘나다’를 붙여 ‘택시 타기가 겁난다’, ‘일을 시작하자니 겁부터 난다’와 같이 용언으로 쓰인다. 전라도 사람들은 무엇이 ‘매우 많다’라는 뜻으로도 ‘겁나다’를 쓴다. ‘축구장에 사람이 겁나더라’와 같이 식이다. 물론 ‘매우’, ‘대단히’, ‘엄청나게’와 같은 뜻의 부사어로 ‘겁나게’를 쓰기도 한다. ‘돈을 겁나게 벌었다더라’가 그런 예다. 이 사람들이 비슷한 뜻으로 즐겨 쓰는 ‘솔찮이’는 그보다 정도가 좀 약하다. 이건 ‘상당히 혹은 아주 많이’의 뜻을 가진 부사어다. ‘쉽지 않게’의 뜻을 가진 ‘수월치 않게’ 따위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거시기, 그 뭐다냐, 얼굴이 솔찮이 이쁘던디?” 이런 식으로들 쓰는 것이다. ‘솔찮이’보다 정도가 심한 걸 표현할 때 쓰는 토속어로는 ‘징허게’가 있다. 이건 남도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이다. 물론 ‘징그럽게’도 빼놓을 수 없다. 두 말의 머리글자가 모두 ‘징∼’인 걸로 미루어 ‘징허게’는 ‘징그럽게’를 줄여 쓴 모양일 것으로 짐작된다. “말을 징그럽게 안 듣는당게.”처럼 둘 다 본디는 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는데 그걸 “징허게(징그럽게) 잘 생겼더랑게?”와 같이도 쓰는 것이다. 본디 뜻이 ‘만지거나 보기에 소름이 끼칠 만큼 끔찍하고 흉하게’인 ‘징그럽게’의 반어적 표현인 셈이다. ‘허벌나게’도 있다. ‘허벌나게 힘들다’, ‘허벌나게 보고 자퍼 죽겄다’라고 하는 것이다.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 기분이 허벌나게 째지는고마 잉?” 앞서 보았던 ‘겁나게’보다 강조의 뜻이 훨씬 센 말이 하나 있다. 무엇일까. 바로 ‘겁도 안 나게’다. “아따, 그 집 세간살이 들어온 거 봉게 우리 겉은 사람 눈에는 겁도 안 나던디?”와 같은 식으로 특히 전라도 지역 시골 아낙들이 주로 쓰는 말이 바로 ‘겁도 안 나게’다.
‘치킨은 음식이다’와 ‘삼겹살은 음식이다’는 둘 다 내용상 아무 문제가 없다. ‘치킨, 삼겹살은 음식이다’라고 이어 쓸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치킨, 삼겹살은 소주 안주로 최고다’라고 쓰는 건 어떤가. 술꾼1 : “에이, 치킨에는 맥주가 찰떡궁합이잖아?” 술꾼2 : “무슨 소리, 치킨도 소주 안주로 최고던데?” 적어도 술꾼1의 눈에는 잘못 쓴 문장일 것이다. ‘어린이의 성장기발육, 빈혈, 간장을 보호해주는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 어느 해장국집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여기서 말한 음식은 ‘뼈다귀탕’이다. 뼈다귀탕의 효능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단어를 잘못 연결해서 쓴 문장이라는 것이다. 뭐가 문제라는 걸까. 이 문장은 ‘어린이의 성장기발육을 보호해주는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 ‘어린이의 빈혈을 보호해주는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 ‘어린이의 간장을 보호해주는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를 하나로 이어 쓴 모양이다. 되묻는 방식으로 하나씩 따져보자.어린이의 성장기발육은 ‘보호’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촉진’시켜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후자 쪽일 것이다. 어린이의 ‘빈혈’을 ‘보호’해준다는 건 말이 되는가. 그러면 뼈다귀탕을 먹은 그 아이는 빈혈에 계속 시달리지 않을까. 어린이의 빈혈을 ‘예방’해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린이의 ‘간장’을 ‘보호’해준다는 말은 얼핏 아무 잘못도 없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보호해야 할 간장은 술에 찌든 어른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일찍이 유치원 시절부터 술맛을 제대로 알고 그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즐겨온 어린이들은 예외다.) 이 문장으로 전달하려는 것은 뼈다귀탕의 효능이다. 그걸 한꺼번에 쓰다 보니 내용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이의 성장기발육을 촉진하고 빈혈을 예방하며, 어른들의 간장을 보호해준다’라고 쓰면 글자 수는 비록 늘어나지만 뼈다귀탕 맛이 훨씬 좋아져서 그 해장국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안전띠를 매지 않았다고 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 도대체 이건 뭣 때문에 단속해서 범칙금까지 물리는 거냐고 스티커를 내미는 교통경찰에게 물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선생님처럼 안전띠를 매지 않은 운전자들 아니겠습니까?” 재산까지는 아니어도 생명을 지켜주는 게 안전띠라고 한다. 실제로 안전띠 덕택에 큰 추돌사고를 당하고도 목숨을 지킨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사고 유형에 따라서는 안전띠를 맨 것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앞세워 ‘재산’의 일부로 범칙금을 물게 하는 게 무조건 온당한 일인지 의문이 드는 까닭이다. 경찰은 단속해서 범칙금을 물리고,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안전띠 매기를 부지런히 독려하고 있다. 고속도로에 내걸린 전광판이나 플래카드에 적힌 각종 문구가 그걸 말해준다. ‘전 좌석 탑승자 안전띠 착용은 필수!’, ‘안전띠 미착용 단속중’ 등 눈에 익은 문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안전띠 착용 비율을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죽고 사는 걸 결정하는 건 안전띠입니다!’도 그중 하나다. 안전띠 착용을 독려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썼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한마디로 죽고 싶지 않으면 안전띠를 매라는 것인데, 좀 섬뜩하게 보여서 하는 말이다. ‘안전띠를 안 매셨다면 당신은 치명적 흉기!’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 앞에 내걸린 배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건 한 술 더 떴다. ‘흉기’가 어떤 말인지 제대로 알고나 쓴 걸까. 안전띠를 안 맸다고 그런 운전자들한테 당신은 흉기라고 윽박지르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라의 법질서를 유린해놓고도 청문회장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한테라면 또 모를까.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정지시, 한정시, 이탈시, 전진시, 음주시…. 무슨 도시 이름이냐고? 천만에다. 그렇다면 ‘음주시’에는 주정뱅이들만 득시글거리고 있게? 우리나라에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는 없다. 혹시 이웃 대륙이라면 모를까. 여기 쓰인 ‘시’는 도시를 뜻하는 ‘市’가 아니라 ‘時’다. 한자말 ‘시(時)’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때’다. ‘時’를 ‘때 시’라고 배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둘을 어느 상황에든 맞바꿔 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열두 시’를 ‘열두 때’라고 쓰지 않는다. ‘그때’를 ‘그시’라고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대개는 한자말 체언이나 용언에 붙여 쓴다. ‘입장시’, ‘숙박시’, ‘착공시’, ‘계약 체결시’ 등이 그런 예다. ‘티타임시’, ‘파일 업로드시’처럼 외래어에도 마구 덧댄다. ‘갈시’, ‘먹을시’, ‘모일시’처럼 순우리말 용언에도 가리지 않는다. ‘시’는 꼭 ‘때’의 뜻으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이메일 전송시 미리 알려주세요.’의 ‘전송시’는 ‘전송할 때’와 뜻이 같다. ‘이메일 전송시 상대방의 주소를 알아야 한다.’의 ‘전송시’에는 ‘전송하려면’의 뜻이 들어 있다. ‘지방으로 가는 승차권 환불시에는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매표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인천공항 매표소 부근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이런 식으로 ‘환불시’와 ‘매표시’처럼 꼬박꼬박 ‘시’를 쓰는 게 과연 옳은 걸까. ‘환불’이나 ‘매표’는 한자말이긴 해도 이제는 거의 우리말처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시’를 마구 덧댄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환불시’는 ‘환불하면’으로, ‘매표시’는 ‘매표할 때’라고 고쳐서, ‘지방으로 가는 승차권을 환불하면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매표할 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썼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쓰인 ‘발생’도 눈에 거슬리기는 매한가지지만….
문장을 읽고 떠오른 다양한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해서 쓰는 송준호 교수의 ‘문장의 발견’은 앞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향전일소보 문명일대보(向前一小步 文明一大步)’, 짧은 한문이다. 공중화장실 소변기 앞에 서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맞은편 벽에 눈길을 잠시 주었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물론 우리가 아니고 이웃 대륙에서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 대충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 한 발짝만 다가서면 우리도 문명화된 사회를 크게 앞당길 수 있습니다.’ 의문 하나가 슬그머니 꼬리를 물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소변을 보다가 이런 걸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 그렇지.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아직 문명화되려면 멀었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도 쌔고 쌨는 걸? 그러니 이런 말이야 당연히 필요하지. 소변기에 바싹 다가서서 볼일을 보면 문명화가 된다고 했으니 나부터 실천해야지, 아암….’ 뭐, 그런? ‘한 걸음만 더…’는 요즘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별견할 수 있는 문구다. ‘깨끗이 이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덧붙인 표지판도 있다. 만약 ‘한 걸음 다가설 줄 아는 당신은 진정한 문명인입니다’라고 적혀 있다면, 그걸 읽은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렇게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문명 좋아하시네. 여러분들이나 실컷 문명하세요.’ 그만큼 문명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고 쓴 건 다분히 수사적이다. 남성성을 자극해서 ‘흘리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우회적으로 당부하고 있어서다. 물론 눈물 말고도 남자라면 함부로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긴 하다. 그걸 주의하는 것이,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것이 공중도덕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남녀 화장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문장이다. 찻집으로 예쁘게 꾸민 어느 어느 고택(古宅) ‘칙간’의 소변기 앞에 붓으로 유려하게 적어 붙인 문구는 이랬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온 국민을 향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하는 심한 자괴감이 든다고 했던 ‘그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청춘예찬] 만화로, 전북으로 돌아오는 길
[오목대] 세계유산,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사설] 농어촌 기본소득, ‘지속가능성’이 과제다
[금요수필]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금요칼럼] 전환기에 놓인 한국의 지방자치
[사설] 불법이륜차 단속, 후면단속카메라 늘려라
[세무 상담] 조정권 세무사의 슬기로운 세금생활
[기고] 무지외반증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과 수술이 필요한 이유
[오목대] 지방선거 복당 변수
[열린광장] “꿈꾸는 청년, 전주의 가장 확실한 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