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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대학 내 한국어교육기관의 운영 책임을 맡아 꽤 오래 일한 적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교사들이 내게 힘이 돼주었다. 성심껏 일해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참 고맙다. 그 가운데서도 Y선생님은 좀 각별하다. 벌써 7년쯤 지난 일이다. 신학기를 앞두고 교사 채용 절차를 밟았다. 우리가 필요한 인원은 다섯 명이었고, 서류전형을 거쳐 직접 면접한 교사는 열 명이었다. 다섯 명은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Y선생님도 그중 하나였다. 담당직원에게 부탁해서 선발된 다섯 명의 채용절차를 밟게 했다. 기대에 부풀어 먼 곳까지 찾아왔다가 결국 탈락한 선생님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좀 망설이다가 나는 그 다섯 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과 함께할 수 없어서 아쉽다고, 용기를 잃지 마시라고,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아차, 싶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불합격통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걸 읽고 기분 좋을 지원자가 어디 있을까. 예상대로 선뜻 답신을 보내오는 지원자는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문자메시지 하나가 떴다. 이렇게 연락을 주신 원장님께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요. 이번 면접을 계기로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바로 Y선생님이었다. 자신을 탈락시킨 이한테까지 정성을 다할 줄 아는 품성이 엿보였다. 그런 선생님이라면 아직 경력은 조금 부족해도 외국인 유학생들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Y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고, 우리 교육원으로 다시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2년쯤 전에 우리 대학을 떠나 이태리 로마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Y선생님에게 문자가 왔다. 연말에 귀국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 지난 2년간 매주 한 번씩 독자와 만났던 송준호 교수가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문장의 발견>의 문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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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24 19:15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그런 말도 안 되는 시절

그 시절에는 학교 다니면서 참 많이도 맞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그랬다. 학급 성적이 꼴찌라고 담임선생님한테 단체로 맞았다. 지난달보다 떨어진 점수만큼 엉덩이나 손바닥을 때린 선생님도 있었다. 심지어 선배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엉덩이에 피멍이 들었어도 집에 가서 맞았다는 말은 뻥끗도 하지 못했다. 오죽 잘못했으면 때렸겠느냐면서 아버지한테 추가로 맞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친구하고 놀다가 다쳐도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곤 했다. 도 넘는 학부모 교권침해, 합의금에 떠는 교사들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보았다. 전학한 학교에서 우리 아이가 적응을 잘 못하는 것은 전에 다니던 학교 담임이 교육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면서 소송을 제기한 학부모에게 합의금 300만원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어느 교사의 우울하기 짝없는 사연이 그 기사에 담겨 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1학년 3반 담임을 맡았다. 그때가 겨우 스물네 살이었으니 말 그대로 애가 애들을 가르친 셈이었다. 어느 날 반 아이 하나가 점심시간에 친구하고 장난을 치다가 넘어져서 입술이 깨지고 앞니 두 대가 부러지는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아이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했지만 부러진 이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를 조퇴시킨 나는 오후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데 청소시간에 교무실로 아이의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염려돼서 제가 먼저 전화했어요.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너무 염려마세요. 물론 30년도 훨씬 지난, 혹은 30년 정도밖에 안 된 옛날 얘기다. 그래도 새삼 돌이켜보니, 참,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시절이 다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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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7 19:58

문자메시지는 힘이 세다

얼마 전에 청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문예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연을 한 적 있다. 강연을 마치고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전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유성 근처를 지날 무렵 조수석에 둔 스마트폰에서 문자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곡휴게소에 들러 담배 하나를 맛나게 피운 다음 스마트폰을 열었다. 교수님. 오늘 강연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오늘 저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앞으로 제가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써서 꼭 좋은 작가가 되겠습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강은별 올림. 대충 짐작이 갔다. 그 강은별이라는 학생은 강연을 듣고 나서 선생님을 찾아가 내 연락처를 물었을 것이다. 먼 곳까지 와주신 교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제법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 학생이 참 기특하고 대견했다. 한편으로는 내 강연이 적어도 한 학생에게만은 작은 울림이나마 주었나보구나 생각하니 꽤 즐거워지는 것이었다. 은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학생이 참 고맙기도 했다. 자신이 새로 펴낸 책에 정성스럽게 서명해서 우편으로 보내주는 선후배들이 적잖다. 택배로 뜻밖의 선물을 받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책이나 선물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하고 문자메시지를 곁들여 보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곤 한다. 그러면 또 그쪽에서도 고마워해 주어서 고맙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온다. 이렇듯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문자메시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세다. 청주를 다녀온 그 다음날 오전에 나는 그 학교로 나를 불렀던 선생님께 문자를 넣어서 강은별이라는 학생의 소속 학년과 반을 물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오래 전에 출간한 책 두 권에 서명한 다음 거기에 이런 말을 덧붙여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열심히 써서 꼭 좋은 작가가 되겠다고 했던 약속, 꼭 지켜야 돼요.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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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10 20:33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참 잘 둔 친구 하나

신호대기하고 서 있는 내 차를 누가 뒤에서 되게 들이받은 거야. 친구의 표정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그 운전사, 혹시 음주운전 아니더냐고 물었더니 그는 빙그레 웃고는 소주 한 잔을 쪽 소리 나게 들이켜는 것이었다. 말도 마라. 아예 걸음을 제대로 못 걷더라니까. 나한테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더니 고개를 푹 수그리고 길가에 주저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대는데, 내가 뭐 딱히 대꾸할 말이 있어야지. 다행히 내 차는 범퍼만 교환하면 될 것 같더라고. 사고를 낸 운전자는 한눈에 보아도 공사현장 같은 데서 험한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겠더라고 했다. 출동 나온 보험회사 직원한테 내가 그랬지. 경찰에 연락하지 말고 단순한 운전부주의 사고로 처리해달라고. 대신 찌그러진 범퍼만 교환해 주면 된다고. 그랬더니 보험사 직원이 정말 입원을 안 해도 되겠느냐고 자꾸 묻더라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일 없을 테니 염려 마시라고 했지, 뭐. 나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그 직원이 그러더라. 저 친구 오늘 운수가 짱짱하다고. 저렇게 엉망으로 취해서 추돌사고까지 냈으니 경찰에 사건처리를 의뢰했으면 당연히 면허취소에 벌금형이고, 또 사장님이 맘 먹기에 따라서는 지금 타고 다니는 고물차 한 대 새 걸로 바꾸는 건 식은죽 먹기라고. 그러면서 친구는 자신이 보험사 직원 말대로 했더라면 당장은 차 한 대가 공짜로 생길지 모르지만 그 돈은 또 어디서 나오겠느냐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살아서 뭐하게. 아니 그렇냐? 그 사고로 뒷목하고 허리가 뻐근해서 요 며칠 고생을 좀 하긴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면서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이거 친구 하나는 참 잘 두었구나, 뭐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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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03 20:20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야냥개를 떨어요

모르긴 해도 우리 지역 사람들이 주로 써온, 일종의 방언이지 싶다. 요즘 젊은 친구들 대부분은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야냥개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가리켜 특정한 동사하고만 묶어 쓴다. 야냥개는 오직 떨거나 부리기만 하는 것이다. 상상 밖의 말이나 행동 따위로 거드름을 피우며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일. 옷차림 따위를 이상하게 차려입고 오두방정을 떨며 멋을 내는 모양. 네이버 국어사전에 들어가 보니 야냥개를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개그콘서트>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를 줄인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정해보자. 네이버에서 발견한 거드름하고 오두방정만 가져오면 된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니? 아니 글쎄 우리 그이가 부장 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상무로 승진을 해버린 거야. 입사동기들 중에 제일 빠르대나 어쩐대나. 그런데 있지, 승진 턱을 거하게 내야 한다네? 다음 달 월급은 아예 포기할 각오를 하라더라고. 어쩌자고 그 인간은 승진을 덜컥 해갖고 사람 속을 이렇게 썩이는지 모르겠어. 어휴, 내가 정말 못살아. 실직한 남편 때문에 근심이 깊은 친구 앞에서 이런 식으로 오두방정을 떨면서 거드름을 피울 만큼 띄엄띄엄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만. 예술기법 중 하나인 풍자는 현실을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럼 야냥개를 떠는 까닭은? 상대방 약 올리기고, 딱 거기까지만이다. 모든 대화는 상대와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잠깐 약을 올려주되, 서로 유쾌하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 야냥개는 무릇, 그렇게만 떨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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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6 20:01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먹을 때 제일 예쁜 여친

아이가 토방에 드러누워 떼를 쓰면 어른들이 그랬다. 너, 오늘 저녁에 밥 안 준다? 그 한마디에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곤 했다. 먹을 게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얘기다. 요즘 애들은 정반대라고 한다. 엄마나 아빠한테 뭔가를 요구했다가 곧바로 들어주지 않으면 대번에 에이, 씨를 앞세운 다음, 나, 밥 안 먹을 거야!라고 선언하기 일쑤다. 그 다음은 상상하는 그대로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예전에는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더불어 자식 입에 맛난 음식 들어가는 걸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장면으로 꼽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에도 입맛 없다고 젓가락 깨작거리면서 어쩌다가 반찬 투정이라도 부렸다가는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쟈가, 배가 부른갑다. 에미야, 밥그릇 뺏어라. 그러면 엄마는 밥상을 내온 뒤 시아버지 몰래 부뚜막으로 아이를 따로 부르곤 했다. 뒤늦게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그 시절 어미들은 자식의 궁둥짝을 두어 번 토닥이고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으리. 어이구, 내 새끼. 복스럽게 잘도 먹네. 그 말 한마디에 자식을 향한 어미의 애틋한 마음이 모조리 담겨 있었던 건 아닐까. 살뜰히 챙겨 먹이는 것 하나로도 자식을 향한 어미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파스타집 앞을 지나다 넌 먹을 때가 제일 예뻐라고 적힌 표지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예쁘다고 한 걸 보니 포크로 파스타를 둥글게 말아 입에 넣고 맛나게 오물거리고 있을 바로 그 너는 분명 여친 쪽일 터. 요즘 남친들은 그 옛날 이 땅의 어미들을 닮아가고 있는 건가. 딸만 둘이면 금메달, 아들만 둘 낳아 기르면 목메달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르다 보니 빙긋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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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9 20:34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이미례 여사

옥구군 대야면, 평야지에서 태어나서일까. 이름 가운데 글자로 미(米)를 쓴다. 어릴 적 별명이 쌀례였대나, 어쨌대나.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셋이다. 스물넷에 토끼하고 발맞춘다는 곰티재 너머로 시집갔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못 마쳤으면서 편지도 유창하게 쓴다. 모르는 한자가 없다. 손재주가 좋아 평생 삯바느질로 어려운 집안 살림을 받쳤다. 아들 셋을 의사 하나, 교수 둘로 키웠다. 제일 늦된 큰아들이 교수 발령을 받자마자 기탄없이 선언한 바 있다. 나, 인자 바느질 그만둘란다. 영어를 모릉게 갑갑해서 살 수가 없다더니 웬걸, 전주의 어느 주부학교로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 일 년 동안 개근 통학하면서 ABC부터 배운 게 환갑을 넘긴 직후였다.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는 더듬더듬 영어로 동갑계원들 화장실 가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 있었다고 아들들한테 자랑질한 적도 있다. 컴퓨터를 전공하는 막내아들한테 쓰던 콤퓨타 하나 갖다 달라고 하더니 아들들이 집에 올 때마다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 건 또 일흔을 넘겼을 때다. 그렇게 해서 인터넷 검색이나 한글문서 작성법을 익혔다. 노인회관에 나가 사군자도 부지런히 그려서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팔십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손자들하고 수시로 카톡 대화를 나눈다. 괜찮은 풍경이다 싶은 장면은 직접 찍어서 며느리들한테 보내주기도 한다. 청년은 미래를 말하고, 노인은 왕년을 말한다고? 그 속뜻이야 당연히 청년은 포부가 있고, 노인은 그게 없다는 것. 누구네 집 김치가 당신 것보다 되게 맛있다 싶으면 그 비법을 궁금해 하고, 직접 물어서 담가보기도 하고. 아무튼 여태도 이루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이미례 여사는, 그러므로 여든셋, 여전히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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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2 19:31

고르면 고를 수 있다

추남과 미녀가 사귀면 그런단다. 저 남자는 직업이 아주 빵빵한가 보다. 그 반대 경우에는 또 이렇게 소근대기도 한다지. 저 여자는, 혹시 재벌 3세? 에이, 그러면 얼굴이나 좀 뜯어 고치잖고, 쯧쯧. 그럼 되게 못생긴 남녀가 아주 그냥 죽고 못사는 연인일 때는? 아, 저 둘은 몹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일 거야. 외모나 경제력으로 사람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을 빗댄, 요즘말로 웃픈 풍자다. 특히 외모는 아예 최고 가치로 여기는 추세다. 어느 드라마에서도 못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라고 했지 않은가. 치아가 고르면, 애인도 내가 고른다라고, 고속버스 옆구리에 적어 붙인 어느 치과의원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순우리말 고르다는 대개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여러 가지 물건이나 사람 중 가려 집어내거나 뽑는다가 그 하나다. 방학 때 읽으려고 고른 책이나 신랑감을 잘 골랐다가 그런 예다. 다른 것들에 견주어 치우치거나 들쭉날쭉한 데가 없이 한결같다라는 뜻으로, 바닥을 고르게 다져라나 성적이 고르게 잘 나왔다와 같이 쓰기도 한다. 치아가 고르면, 애인도 내가 고른다라는 문구는 이 두 가지 뜻을 교묘히 묶어낸 것일 터. 예로부터 치아 건강은 오복(五福) 가운데 하나로 쳤다. 그게 날 때부터 고르기까지 하다면야 더 바랄 게 있을까. 광고의 속성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좀 실없는 의문 하나가 똬리를 튼다. 교정해서 고른 치아를 갖게 된 남녀가 상대를 잘 골라서 결혼했는데 그 사이에서 나온 아이의 치아가 토끼이빨이거나 뻐드렁니라면? 아, 그때도 저 치과를 찾아가면 그만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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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05 19:39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화암사에 한번 가보라고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중략)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잘 늙은 절 한 채/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화암사, 내 사랑/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화암사로 가는 길에 안도현 시인의 시 <화암사, 내 사랑> 앞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중략)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 서로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에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그가 쓴 <잘 늙은 절, 화암사>에서도 소중한 책 같은 절에 대한 곰삭은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깊어가는 가을, 한 번쯤은 화암사로 마음을 이끌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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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9 19:48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고독이 몸부림 칠 때

누구나 지축 위에 / 홀로 서 있나니 / 햇살 한 줄기 뻗쳤는가 하면 / 어느덧 황혼이 깃든다. 살바토레 콰시모도라는 시인이 쓴 <황혼이 깃들고>의 전문이다. 우리들 각자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으되, 햇살이 머무는 시간은 짧고, 어느덧 깃드는 황혼처럼 누구나 항상 홀로 서 있는 존재라는 것. 오래 지난 영화 포스터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고 고독을 생각하다가 귀에 익은 노래를 흥얼거려보았다. 너를 보내는 들판에 / 마른 바람이 슬프고 / 내가 돌아선 하늘엔 / 살빛 낮달이 슬퍼라 / 오래토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길로 백창우가 만들고, 임희숙이라는 가수가 불러서 크게 히트한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의 1절이다. 노랫말의 화자인 나는 너와 헤어진 뒤 찾아온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 때문에 쓸쓸하다. 혹은 고독하다. 곁에 아무도 없어서 외로움을 견디기가 막막하다.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 나설까 하지만 너를 만날 기약 또한 없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혼자 / 사랑을 잊지 못해 애타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노래, 1960년대 가수 차중락이 불러 히트한 <사랑의 종말>은 산산이 부서져서 허공중에 헤어졌기 때문에 불러도 주인없고 부르다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던 소월의 <초혼>을 연상시킨다. 영화제목을 다시 들여다보니 언제가 들어본 적 있는 옛 노래 한 구절이 또 떠오른다. 가슴 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패티김이 부른 <초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처럼 새삼스레 고독을 떠올리는 것, 가을이 깊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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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2 17:56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어느 북적거리는 페스티벌

공공도서관이 다섯 곳이다. 그중에는 영어전문도서관이 포함되어 있다. 각 읍면에 둔 작은도서관 열 곳과 학교마을도서관 다섯 곳을 더하면 자그마치 20개의 크고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 군 단위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독서 인프라를 갖추었다. 우리 지역 완주군 얘기다. 지금 이서혁신도시 소리공원 앞에 짓고 있는 공공도서관은 특별히 여행과 자연과학을 테마로 운영할 계획이란다. 2019년 4월 완공을 앞두고 이름 공모전까지 마쳤는데, 전국 566개 응모작 가운데 완주콩쥐팥쥐도서관이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새로운 지식을 쌓고 삶의 의미를 탐구하며 꿈을 키우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마을공공도서관에서 책 읽는 습관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지역민들의 삶에 깊이를 더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키워가자는 뜻이었으리라. 완주군은 도내 최초로 책 읽는 지식 도시를 선포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도서관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독서회 회장들과 유관기관 관계자들로 구성된 독서추진위원회도 발족시켰다. 그로부터 해마다 10월이면 북적북적 페스티벌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독서축제를 개최해 왔다. 이는 완주군이 자랑하는 와일드푸드축제와 더불어 민관이 긴밀하게 협력해서 추진하는 풀뿌리 독서운동의 전국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전국 도서관 관계자들의 부러움과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북적북적은 본디 많은 사람이 모여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아하, 모름지기 축제는 그러해야 하리. 거기에는 다른 의미도 들어 있다. 북적북적(book積 book積)이다. 지식의 보고가 책이니, 내 안에 책을 쌓고 그걸 읽어 지식을 쌓는다는 것. 북적북적이야말로 더욱 풍성한 가을로 가는 지름길인 까닭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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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5 20:29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목이 마르면 물을 드세요

한글날인 내일도 청명한 공기상태가 계속되겠습니다. 어느 기상전문 캐스터의 말을 운전하다가 들었다. 청명(晴明)한 공기상태(空氣狀態)가 계속(繼續)되겠다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던 걸까. 혹시 그런 한자말을 늘어놓으면 품격이 저절로 오를 거라고 믿어서, 아니면 습관? 한글은 겨레의 자랑이자 인류의 위대한 발명이라고 했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고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이므로 정부와 온 국민이 함께 빛내야 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튼튼해진다고도 했다. 한 나라의 말글은 그 나라의 얼이고 정신이라면서 1990년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한글사랑, 나라사랑 정신이 흐려지고 우리 말글살이가 혼란스러워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이 주도한 국민청원 글의 일부다. 그들은 한글이 세상에 반포된 것을 기념하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온 국민과 함께 이를 경축하고 인류 문화문명 발전에 이바지할 때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들이다.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는 대목만 빼면 그렇다. 생각해보라. 빗발치는 국민청원에 한글날을 공휴일로 다시 지정한 게 2013년 일인데, 그로부터 몇 년간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모두 촛불을 들고 세종대왕을 모신 광장에 모여 그게 나라였냐고, 이게 나라냐고 한탄했으니 하는 말이다. 폐일언(蔽一言)하고, 한글날마다 소중한글을 갉아먹는 외래종으로 입에 자주 올리는 게 영어라지만, 몰라서 그렇지 더 심각한 것은 품격을 착각하고 마구 주워섬기는 한자말이다. 지독하게 더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TV 속 기상전문 캐스터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갈증이 발생하면 수분을 섭취하세요.라고.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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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8 19:24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여자 말을 잘 듣자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웃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아아 인생. 김용임이라는 트로트 가수가 부른 <도로남>의 앞부분이다. 어디 점 하나뿐이랴. 받침만 빼도 남하고 님 만큼이나 뜻이 달라지는 옛말이 몇 개 있단다. 인명재천(人名在天)의 천(天)에서 ㄴ을 빼보라. 처(妻)가 된다. 언필칭 인명재처(人名在妻)다. 세상 남자들 목숨은 처, 즉 여자가 쥐고 있다는 것. 점 하나에만 울고 웃는 게 인생사일까. 받침 하나에도 실컷 웃프고도 남는다. 무릇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이라 했으니 혼신의 노력을 다한 뒤 아내의 처분을 기다릴 일이다. 물심양면으로 온갖 정성을 기울여도 아내 한 사람 감동시킬 수 있을까 말까다. 지성(至誠)해서 감처(感妻)하게 만들 줄 아는 남자라야 비로소 처하태평(妻下泰平)도 바랄 수 있을 터, 이쯤 되면 처(妻)야말로 천(天)하고 동급이라는 데 세상 어느 남자가 감히 이의를 달 수 있을까.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말을 잘 들어야 할 여자는 또 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처럼 늘 바른길로만 인도해주시는 차 안의 그 내비 양이다. 여자 말 안 듣고 길을 잘못 잡았다가 귀한 시간 허비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깟 기름값 좀 아끼자는 말일 리도 없다. 사필귀처(事必歸妻)라서는 더욱 아니다. 함께한 지 벌써 십수 년인데도 그 목소리가 한결같아서다. 어쩌다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도 불같이 화를 내기는커녕 인상 한 번 찌푸리는 법 없어서다. 행(行)은 몰라도 언(言) 하나는 더없이 나긋나긋해서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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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01 19:35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서비스 안주를 드릴게요

웬만한 이는 다들 아는 이야기다. 어느 중국집 사장하고 주방장이 사소한 일로 대판 싸웠다. 화가 풀리지 않은 주방장은 자신이 당한 걸 갚아주기로 했다. 다음날 장을 직접 보러 간 그는 가격이 제일 비싼 특특1등급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샀다. 각종 해산물도 냉동제품을 쓰던 평소와 달리 산지에서 갓 배송되어 온 싱싱한 걸로만 골랐다. 조리할 때는 고급 양념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음식을 만들면 재료값이 훨씬 많이 들어가서 식당이 곧 망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한 열흘쯤 지나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앞다퉈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주방장은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했고, 사장은 홀 서빙하고 배달 알바를 두 명이나 급히 고용했던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 음식창의도시 전주의 특색 중 하나가 가맥이다. 그곳을 가끔 혹은 자주 들락거려본 술꾼들은 알고 있다. 벽에 적힌 안주들 중 하나를 반드시 주문해야 한다는 걸. 1차에서 배를 가득 채우고 옮겨온 자리여도 예외가 없다. 안주 없이 맥주만 홀짝거리고 앉아 있으려면 주인의 따가운 눈 화살을 견뎌낼 만한 철판 같은 맷집을 갖추어야 한다. 정말로 딱 한 잔씩만 더 하자고 들른 어느 작은 가맥에서 안주 미주문시 맥주 소주 5,000원이라고 적어 붙인 안내 문구를 보았다. 거기에 담긴 속뜻을 누군들 모를까. 주인 몰래 그걸 곱잖게 쳐다보다가 맥주 소주 5,000원을 눈으로 지워냈다. 그 자리에 이런 문구를 슬그머니 얹어보았다. 안주 미주문시 계절과일을 서비스로 드릴게요 그 정겨운 한마디에 감동 먹은 술꾼들의 발길이 그 가맥으로 줄줄이 이어지지 않을까. 그런 순진한 상상에 대고 씨잘떼기 한 푼 없는 소릴랑은 허덜 말라는 주인이 있다면, 좋다. 안타깝지만 그분은, 거기까지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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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7 19:39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그대가 제일 예쁘다

몇 년 전 일이다. 어느 프로축구 구단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선수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클럽하우스 로비에 고구마 모종을 심은 화분 두 개를 놓았다. 각각의 화분 앞에는 좋은 말 고구마와 나쁜 말 고구마라고 적었다.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선수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화분에 바싹 다가갔다. 좋은 말 고구마에게는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을 건넸다. 사랑스런 고구마야, 넌 참 예쁘구나. 앞으로도 무럭무럭 잘 자라거라. 나쁜 말 고구마에게 던진 말은 정반대였다. 이 못생긴 고구마야. 넌 어찌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아무튼 너는 안 돼, 꺼져! 두 달쯤 지나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건넨 말을 빼고는 똑같은 환경에서 키웠는데 좋은 말 고구마는 줄기와 잎이 싱싱하고 무성하게 자란 데 반해 나쁜 말 고구마는 발육 상태가 현저히 떨어질 뿐 아니라 이파리까지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무정물(無情物)인 줄만 알았던 고구마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라고 했던가. 자식의 원인은 부모고, 너의 원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너를 디뎌야 내가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경쟁사회 탓인가. 너나없이 칭찬에 인색하고 비난에 익숙해져 있다. 줍는 손 예쁜 손, 버리는 손 미운 손에 대구하면 칭찬하는 입 예쁜 입, 비난하는 입 미운 입이다. 한가인이라는 배우가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은 평일에 낚시하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보다 더 한가한 이는 따로 있다.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이다. 비슷하다. 그대가 제일 예쁘다고 말하는 순간 그대보다 더 예뻐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렇게 말해줄 줄 아는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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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3 19:55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좋은 문장을 쓰는 방법 8

어느 음식점에서 박은 그림이다. 거두절미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첫 문장이다. 굳이 업소라는 말을 써야 했을까. 식당이 더 흔한 말이어서 궁금했던 거다. 집에서 직접이라고? 직접만 적어도 중국산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을까. 담아는 또 뭐지? 재료를 섞어 익도록 한다는 뜻을 가진 우리말은 담그다니까 담가라고 써야 옳았다. 아하, 김치를 담가서 항아리에 담아 쓴다는 뜻? 그렇다면 더 보탤 말이 없다. 사용합니다는 굳이 덧대야 했을까 싶다. 두 번째 것은 어떤가. 초벌은 첫 번째 차례를 뜻하는 한자말이다. 하나의 문장에 모양이 같은 말은 한 번만 써야 한다. 앞 초벌은 빼도 뜻을 전달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아니면 뒤의 것을 빼거나. 5~10분정도는 5~10분 정도로 띄어 써야 옳다. 다음에 보이는 소요됩니다의 소요(所要)는 그야말로 제발 좀이다. 걸립니다라는 좋은 우리말을 죽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앞당길까 걱정돼서다. 사전을 찾아보니 콜라겐은 동물의 힘줄, 피부, 머리카락 등에 들어 있는 특수한 단백질이라고 한다. 이게 피부미용에 아주 그만이라고들 하는데, 몰라서 그렇지 돼껍 같은 걸 아무리 먹어도 몸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이 문장에 굳이 딴지를 걸자면, 튀김 종류나 땅콩은 맥주하고 잘 안 맞는다는 불편한 진실. 앞의 두 문장은 저희 식당에서는 김치를 직접 담가 씁니다. 참숯불 삼겹살은 미리 굽는 데 510분 정도 걸립니다.라고 썼더라면 더 좋았지 않을까. 밥을 맛나게 먹고 나오다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그걸 박고 있으니 누군가 뒤에서 그랬다, 뭣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에이, 그냥 개 눈에는 똥밖에, 라고 하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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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7 20:08

인생은 고기서 고기?

부질없는 것이라고 했다. 가수 방실이가 <서울탱고>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랬지 않은가.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구름 같은 것이라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봄밤의 꿈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뜻으로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불러오기도 했다. 남가일몽(南柯一夢)도 같은 뜻을 지녔다. 어떤 이는 연극이라 했고, 공수래공수거라 이르기도 했다. 모두 세상살이 혹은 인생을 일컫는 말이다. 하긴 얼마나 빨리 지나면 쏜 화살에 다 비유했을까. 즐겁고 신나는 일만 겪으면서 살아도 너무너무 짧은 게 인생이더라고 하는 말까지 들은 적 있다. 짧으면 짧은 대로 누구나 한번 왔다가 틀림없이 떠나게 되어 있는 것 또한 인생일 터, 그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정의를 내려왔지만, 특별히 금과옥조로 삼고 싶은 말이 있다. 적어도 호랑이처럼 가죽이나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를 남겨야 한다 혹은 남길 줄 알아야 한다로 고쳐 읽는다.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영원히 살라는 말이 아니다.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아무개나 또 다른 아무개들처럼 사람들 입에 이름 석 자가 두고두고 오르내리게 하라는 말일 리는 더욱 없다. 덧없고 짧으니 내가 손에 쥔 걸 가까운 이들하고 나눠 가질 줄 알라는 것, 나보다 가난하거나 힘이 약한 이들을 배려하면서 살라는 것, 그리하여 훗날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많은 이들이 가끔 혹은 자주 그리워할 만한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인생은 어차피 고기서 고기다, 어느 연탄구이집 앞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띈 그 애교 섞인 문구에는 선뜻 빙긋 동의할 수 있었으되, 적어도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인생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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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0 19:08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배드민턴 메카 도시 전주 (2)

우리 전주시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인적 자원일지도 모른다. 조선 26대 왕인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다르다. 펠레를 축구 황제로 예우했던 것처럼 그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매료된 세계인들은 권좌를 만들어 그를 자발적으로 ‘추대’했다. 그림에 보이는 ‘배드민턴 황제’ 얘기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 총리 이름은 몰라도 ‘팍’이나 ‘쭈봉’을 모르는 이는 없더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광장의 노점상들까지 나서서 ‘주봉 버거(burger)’를 팔고 있다지 않은가. 영국, 덴마크, 스웨덴 같은 유럽 국가에서도 ‘팍(Park)’은 ‘쌤숭(samsung)’에 버금가는 한국적 상징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를 낳아 기른 우리 전주에서는 그의 자취조차 찾기 어렵다. ‘배드민턴 메카 도시’는 ‘황제’를 브랜드삼아 추진하면 된다. 무주 태권도 공원을 모델로 한 배드민턴 공원을 조성한다. 그의 이름을 붙인 체육관도 짓고, 세계에 하나뿐인 기념관도 세운다. 전용 선수촌을 건립하면 국내외 국가대표뿐 아니라 학생과 유소년 선수들의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상위 랭커 초청경기 형식으로 치르는 ‘주봉컵’ 국제대회의 창설도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본부를 전주시에 유치하는 건 과연 꿈같은 일이기만 한 걸까. 배드민턴을 아끼는 유럽과 동남아 국가 사람들의 발길을 전주로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째서 ‘황제’인가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자료집이나 평전 형식의 책자를 발간해서 적극 활용한다면 전주에 기반을 둔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개척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의 글로벌 위상 또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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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3 19:23

[송준호 교수, 문장의 발견] 배드민턴 메카 도시 전주 (1)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이라는 게 있다. 스포츠나 예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일종의 박물관 같은 것이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거의 모든 종목에 걸쳐 이걸 운영하고 있다. 골프의 경우 박세리와 박인비 선수가 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가 세계기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가장 많이 올린 종목은 바로 배드민턴이다. 무려 여덟 명이나 된다. 그 면면을 살펴보다가 꽤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중 절반인 네 명이 아예 전주에서 나고 자랐거나(박주봉과 하태권), 가까운 익산과 김제 출신으로 전주에서 성장(김동문과 정소영)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넷 중 김문수 선수는 알려진 바대로 ‘황제’의 조력자로 활약했다. 정명희 선수 또한 ‘황제’의 혼합복식 파트너로 국제경기에서 23회나 우승했다. 길영아나 라경민 선수도 김동문 선수가 없었더라면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그토록 많이 따는 게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배드민턴을 세계 톱클래스에 올려놓은 장본인들이다. 그런데 이 선수들을 대표단에서 직접 지도했던 한성귀 감독 또한 전주시 (태평동) 태생으로 박주봉, 김동문, 하태권의 전주농고 대선배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배드민턴이야말로 가장 전주다운 스포츠라고 보는 까닭이다. 김승수 전주시장이 지난 지방선거 때 내놓은 공약 중 하나가 ‘스포츠 메카 도시 전주’다. 그 첫 모델로 ‘배드민턴 메카 도시’부터 만드는 건 어떨까. 전주시가 적극 나서서 관련 단체 구성원들과 함께 지혜를 적극 모은다면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전주 상품’을 하나 더 갖게 될 것이다. 이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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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06 20:07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여자와 남자도 그중 하나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더위를 잘 타는 이와 안 그런 사람, 착한 사람과 안 착한 사람,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제는 거기에 자신의 잘못과 흠결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과, 이쑤시개 문 이빨 사이로 ‘그까이꺼’를 내뱉으면서 콧방귀를 뀌는 사람으로 나누는 방법도 덧붙여야겠다.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자주 당하고 욕을 엄청 먹는 사람들일수록 오래 산다고 했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몰라서였으리라. 그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헤아릴 길이 없었는데, 지난주에 그 귀한 목숨을 던져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정치인 한 사람의 뒷모습을 통해 그걸 뼛속으로 깨닫는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은 괴로워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평생을 바쳐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을 실망시켰다는 게 그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더 이상은 그들 앞에 얼굴을 내미는 것조차 두려웠을 것이다. 그 어떤 욕을 먹어도 목을 빳빳하게 세우는 수많은 철면피의 두꺼운 철가면을 잠시 빌려 쓰는 것조차 그는 스스로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을 남녀로 구분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커피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건 취향 차이에 불과하다. 더위를 잘 타고 안 타고는 체질이 다른 것뿐이다. 감성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또한 바람직하고 아니고를 따질 수 없다. 영면에 든 그가 그리울 때마다 한동안은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누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에 골몰하지 않을까 싶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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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3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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