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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조선시대 토지대장 '양안(量案)'

고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부군(古阜郡) 양안. 숙종대 기해양안과 동일한 양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desk@jjan.kr)

 

어느 사회이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만큼 온 국민의 관심사로 대두되는 것은 없다. 신행정수도 후보지역의 공시지가 이의 신청이나, 수도권 지역민들이 재산세(건물분)의 인하, 환급을 요구하는 이의신청을 무더기로 제기하였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세금제도가 있을까마는 언제나 받아야 하는 자와 덜 내려는 자들이 서로 끊임없이 묘안을 짜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복잡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역시 세금 문제는 위정자들의 고민거리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 세금은 땅에 부과하는 전세(田稅)와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貢納) 그리고 호적에 등재된 정남(丁男)에게 부과하는 군역(軍役)과 요역(?役)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비중은 낮았으나 공업세, 광업세, 상업세 등 다양한 세금이 존재했다. 이들 세금 중 국가 재정에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땅에 부과하는 전세였다.

 

조선시대 전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20년 마다 한 번씩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는 데 이를 ‘양전(量田)’이라 한다. 그러나 전국적인 토지조사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조선시대 500년 동안 4차례 정도 시행되었을 뿐이며, 그 외에는 필요에 따라서 지역별로 이루어졌다. 이런 조사를 바탕으로 ‘양안(量案)’이라는 토지대장을 3부 만들어 해당 읍면과 도, 서울의 호조에 각각 1부씩 보관하고 세금의 부과 기준으로 활용하였다. 이렇듯 공시지가를 조사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은 같지만, 조선시대에는 수확량에 따른 토지면적(결부수)을 함께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수확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므로 어느 규모의 토지에 얼마만큼의 쌀이 생산되는가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고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부군 양안(전북대 도서관 소장)을 통해 보면 양안은 자호(字號, 양전의 단위로 천자문 순으로 표시), 지번(地番, 자호 내의 필지순서), 양전방향(양전을 실시하는 방향), 토지등급, 지형 및 실제 크기, 결부수(수확량에 따른 토지면적), 사표(四標, 전답의 인접지역), 진기(陳起, 농사를 짓는 起耕田, 짓지 않는 陳田), 소유자 등 일람표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양안은 농민의 경작면적, 소득 관계 등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통계자료로 활용된다. 이 고부군 양안 이외에 현재 우리 고장의 양안으로는 1719년에 만들어진 고산(11책), 남원(5책), 임실(10책), 전주(20책)의 기해양안과 광무년간에 작성된 전북 14개 군의 양안이 남아있다.

 

공시지가를 낮추려는 것은 세금을 덜 내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세(田稅)를 덜 내거나 내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양안에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누락시키거나 생산량을 축소 등재해야 한다. 반면 악덕 수령은 과대 허위 기재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세금을 강제로 거두어들이고 이중장부를 통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고부군 양안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은 이를 통해 동학농민군의 ‘배고픔의 저항’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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