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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⑧인물이 잘났던 장재백

맥 끊긴 '남원 판소리' 다시 부활시키다…집 나간 전처 소리듣고 '감동' 재결합 사정

판소리 소리꾼 중에는 인물이 잘난 사람이 많았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김세종도 인물이 잘났다고 했고,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이동백도 인물이 잘나서 창원부사의 애첩이었던 기생이 야반도주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사진을 보면 소리꾼들은 인물이 거의 다 좋다. 요새도 가수들의 인물이 다 잘난 것을 보면, 인물 잘난 사람들이 노래를 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재백은 김세종의 제자로 전북 순창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름도 '장재백'이 아니라 '장자백'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남원시 월락동에서 '장재백'이 나오는 호적이 발견되었다. 이름도 '장자백'이 아니라 '장재백'으로 되어 있었다. 지난 주에 소개한 <연수전중용하기> 에도 '장재백'으로 나온다. 따라서 '장자백'은 '장재백'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장재백의 부인도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장재백의 소리 솜씨가 좋지 않은 것을 못마땅해 하다가 대성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옥구의 어떤 사람의 첩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장재백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친신만고 끝에 마침내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장재백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옥구의 잔치집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장재백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전처는 몰래 잔치에 참여하여 장재백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인물 좋은 장재백이 소리마저 잘하게 되자 다시 솟아나는 연모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장재백의 소매를 붙잡고 다시 인연을 맺자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장재백은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장재백은 남원 판소리의 역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남원의 판소리는 가왕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동생 송광록이 구례로 이사함으로써 남원의 판소리는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남원의 판소리를 이은 사람이 바로 장재백과 그의 가문이다. 장재백의 누이 장주이는 유성준의 처이다. 유성준은 송만갑의 아버지 송우룡의 제자로 <수궁가> 와 <적벽가> 를 잘 불러서 후대에 전한 사람이다. 유성준의 제자로는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동진 등이 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유성준의 소리가 현대 판소리에 끼친 공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준의 동생 유준은 김정문의 어머니이며, 김정문의 처 장봉선은 장재백의 막내 동생인 장봉순의 손녀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제자로 남원 판소리를 대표하던 사람이다. 강도근 박록주 박초월이 그의 제자이다. 장봉선의 언니 장봉임은 전라북도 문화재였던 성운선의 어머니이며, 장재백의 동생의 아들(조카)인 장득진은 이화중선의 남편으로, 이화중선을 가르친 사람이다.

 

김정문 이후 남원 판소리를 대표하던 명창 김영운은 김정문의 조카이며, 강도근의 매형이기도 하다. 강도근의 집안에서는 또 여러 명의 명인 명창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보면 장재백의 가계가 남원과 순창 일원의 판소리 명창들과 혈연으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 판소리를 면면히 이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장재백은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에서 살다가 1907년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으며, 현재 그 묘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장재백의 부친을 비롯한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순창에서 살았고 묘지도 순창군 인계면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장재백 또한 순창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출생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장재백의 후손 중에서 1970년대까지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전주를 대표하던 소리꾼 중의 한 명이었던 장녹운이 그의 증손녀이다. 장녹운은 명무에 명창이었는데 소리를 그만두고 어렵게 살다가 별세하였다. 말년의 장녹운은 상청이 잘 나지 않았지만, 공력만은 대단했다. <춘향가> 중에서 어사와 장모 상봉하는 하는 데를 기막히게 잘하였다. 춤도 잘 추어 국립극장 명무전에 초대되기도 했었다.

 

장재백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교지를 받았다. 이 교지는 소리꾼이 받은 교지로는 아마 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교지일 것이다. 이 교지에는 장재백의 이름이 '장기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름은 족보에 나오는 이름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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