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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친구 하실래요?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전북대 옛정문 근처에 가다보면 낡은 웨스턴 바가 하나 있다. 필자는 친구와 함께 방학을 핑계삼아 매일같이 그 바에 드나들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가게인데 뭐가 좋았는지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간 적도 있었다. 옛날 미군부대 앞에서나 볼 법한 불그스름한 간판, 호프집 같은 테이블 다섯 개, 'ㄷ'자로 생긴 바 하나, 지직거리는 앰프 몇 개가 전부인 허름한 가게지만 새벽 공기를 맞으며 그곳에 가는 일은 먼 고향에나 가는 듯 설렜다. 주력(酒力)이 필력이라는 학과 교수님의 말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라며 마음대로 위로하면서!

 

이곳은 주말 새벽이 되면 외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외국인들이 많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단체로 서서 맥주병을 하나씩 손에 들고 큰 제스처를 해가며 열심히 얘기를 나눈다. 그 맥주가 국산이라는 것 빼고는 그들에게 한국 취향을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특히 클럽음악이나 외국 유행가가 나오면 꽥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몸을 부비고 춤을 추는데 우리가 봤을 땐 자유롭다기보다 오히려 뻔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애초부터 타국과 자국의 차이는 없다는 듯 그들은 내내 흥에 겨워 있었다. 친구와 필자는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도 급격한 시차를 느끼고 칵테일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그러던 중, 외국인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간단한 말 빼고는 의사소통이 안돼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애써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같이 온 동생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동생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 회화는 수준급이었다. 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사이였지만 한번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 나는 잘됐다 싶어 계속 더 얘기해보라며 부추겼다. 그러자, 동생 곁으로 외국인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갑자기 우리가 앉은 자리 주변이 토론의 장이 됐다. 캐나다에 몇 년 살았냐, 8년 살았다, 무슨 일을 하냐, 우리는 영어강사를 하고 있다, 넌 무슨 일을 하냐, 대학생이다, 대화는 탁구공 튕기듯 쉴새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친구도 나도 신기해서 동생의 입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삼 십분 쯤 지나자 이내 흥미를 잃고 말았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6교시 영어듣기 시간이라며 깔깔 웃었지만 못내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몇 년 전, 친구들이 하나 둘씩 유학을 떠나고 너도나도 워킹비자를 신청했을 때 나는 뚜벅뚜벅 서점을 갔다.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꼈는지 영어서적 코너를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맨 땅에 헤딩하기'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의 글쓴이는 지금 억대 연봉의 스타강사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지방사립대를 다니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은 다음 호주로 유학을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한국유학생들의 광경은 가관이었단다. 말 배우러 온 사람이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 'VOCA 영단어'나 '맨투맨'같은 책만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고. 그리고 화살은 독자에게 날아왔다. 유학은 집어치우고 이태원에 가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라고. 말이야 쉽지, 몇 년 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바로 책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이젠 조금 용기를 내야겠다. 평생 짝사랑만 하는 영단어와 문법책과는 이별하고 사람 좀 만나야겠다. 그래서 방방 뛰는 그들에게 시비라도 붙여봐야겠다. "같이 노실래요?"라고. 그래서 친구가 된다면, 한국에선 한국말을 쓰라고 으름장을 놔야겠다.

 

/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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