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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청춘열병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청춘'에 날개가 돋쳤다. 청춘이 제목인 책이 서점을 휩쓸고, 대학에는 이를 주제로 한 강연이 '수강신청'을 방불케 할 만큼 인기다.

 

책은 사회동향을 귀신처럼 포착해 적시에 독자 앞에 놓이고 사람들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인다.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이 전국을 강타하자 '공부의 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책을 펴내고, 공정사회라는 말이 대통령 경축사로 전파되자 이를 풍자라도 하듯 정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런 이유로 이번 청춘 열풍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젊은 세대의 불안은 뼛속까지 침잠했고 기성세대는 그 불안을 간단한 위로로 처방했기 때문이다. 적시적지(適時適地)에 나타나 일갈하는 그들은 과연 정당한가? 선거철의 정치인처럼, 공정사회의 정의 책처럼, 그들도 기회를 엿보다 인생 선배를 자처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반전을 그저 넙죽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꿈 없고, 의식 없고, 예의 없고, 사회 정치 관심 없고, 할 줄 아는 건 오직 영어 밖에 없는 20대를 위하여 여태껏 아무도 편지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까? 그리하여 무한경쟁에 자존감까지 잃고 88만원세대라는 이름만 남은 20대에게 "너희 잘못이 아니야" 라고 늦게라도 말하면 청춘은 과연 힘을 낼 수 있을까?

 

얼마 전 청춘 멘토링에 다녀온 친구는 말했다. 굳이 신청까지 해서 들으러 가는 것이 모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했지만 강연을 듣는 내내 거짓말처럼 행복했다고, 그들이 있어 든든했다고 했다. 그리고 강연내용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보여주면서 '이렇게나마 생각해주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라고도 했다. 그만큼 20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자조섞인 이야기가 왜 대학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지 생각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대학의 교수는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고 학생은 시간이 남아돌아도 교수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려보지만 출장 중이거나 보직 활동에 열중인 교수가 태반이고 학기 내내 얼굴 한번 안 비추다가 휴학에 자퇴까지 덜컥 혼자 결정해버린 뻔뻔한 학생들도 적지 않다. 강의만 하고 제 일에 바쁜 교수는 학원 강사나 다를 바가 없고, 필요할 때만 찾아가 통보하는 이들은 학원 수강생보다 못하다. 멘토를 자처하는 유명 인사보다 늘 가까운 곳에 있고, 멘토를 찾아가야 할 만큼 절박한 이들이 지천이지만 우리는 제 식구들에게 더 무심한 것이 현실이다.

 

청춘이 제 값을 못하면서 그 '말'에나마 기대보자는 심정으로 기이한 열풍이 일고 있는 요즘, 진짜 청춘이 그립다. 청춘이 우리에게 너무 멀리 떠나있는 까닭이다. 폭삭 늙어 도망간 까닭이다. 그래서 젊은 청춘을 찾아, 오지를 찾아나서는 심정으로 그들을 쫓아가 구구절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지 버나드쇼는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엔 너무 아깝다'고 했지만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젊음에게 따귀를 맞고 있다. 그래서 이 열풍마저도 고맙다. 드디어 우리 세대의 열병이 엄살이 아닌 진지한 사회문제로 자리 잡은 것 같아 감격스럽다. 끙끙 앓던 청춘들이 정확한 병명을 알고 제대로 된 처방을 받는 것 같아 기쁘다. 그러나 청춘의 이름을 빌려 너무 많은 것을 사고팔지 말기를 바라며. 서울도 좋지만 동네병원에서도 꼭 진단 받아보길 바라며.

 

/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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