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남 (전주YWCA 회장)
한여름의 무더위는 사람을 너무 지치게 만든다. 가끔씩 시원하게 울어주는 매미소리마저 없다면 이 뜨거운 불볕더위를 어떻게 견뎌낼까 싶다. 장맛비에 시달리다가 불볕더위가 오더니 태풍까지 소나기도 삼형제라더니 올해는 기후변화에 따른 여름철 3종 세트메뉴를 골고루 호되게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기후변화만큼이나 많이 달라진 것이 여름휴가를 보내고 난 뒤의 풍속도인가 보다. 예전에는 여름휴가가 끝나면 바캉스 베이비붐이 일었는데 요새는 워낙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인지 그렇게 즉흥적으로 일 저지르는 낭만주의자들이 사라지고 없는 듯하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집값과 혼수비용을 이리저리 계산해서 겨우 짜 맞춰서 힘겹게 그 문턱을 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가지는 것도 한참동안 궁리를 해봐야 하는 실정이라서 여름휴가라는 낭만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고 바캉스 베이비를 갖는 호사를 누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막상 결혼이라는 관문을 넘어 아이를 가졌다 치자. 아직 손을 많이 탈 아이가 있는 일하는 여성에게 여름휴가는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 피로와 짜증이 후유증으로 남는 노역이 되기 십상이다.
되돌아보면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들 방학이 되어 가족끼리 오순도순 함께 캠핑을 즐기는 남들이 보기에 이상적인 휴가모델보다는, '아이들만 데리고 어서 캠핑 떠나주소. 집에서 여유 작작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뒹굴 거리며 편히 한번 쉬어보는 것이 나의 휴가요'라는 극히 이기적인 휴가모델을 아주 많이 선호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요즘 같은 시기가 일하는 여성들이 여름휴가 끝나고 심리적으로 갈등이 많을 때라고 한다. 겨우 시간 맞추고 짬을 내어 모처럼 가족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하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비교대상이 되어 겉으로는 평안을 유지하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 정도야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소리 없이 빠져나가 돈 부피는 얇아지고 신용카드 영수증은 부피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 때부터는 다음 달 날아올 명세서를 생각하면 즐겁기는커녕 머리 아프기 십상이다.
거기다가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교해보게 되면 거의 대부분이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게 된다. 나보다 훨씬 나아보이는 데다가 일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더 나아가서는 곁에 있는 사람이 무능해보이면서 감정적 트러블을 겪기도 한다.
현실은 때때로 신념을 흔들리게 하고 재고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왠지 나만 허덕이며 사는 것 같아서 그동안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나 원칙, 습관들을 내려놓아 버리고 싶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워킹맘의 바캉스 후유증이고 경력단절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새처럼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사람들은 거의 직관적이고, 기대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지기 쉬운 동물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지만 자기경력 만큼은 기후변화를 겪지 말기를 바란다.
/ 김형남 (전주YWCA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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