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사리봉안기' 발굴 뒤…미륵사 창건, 선화와 무관 주장 '전설적 사랑 이야기'까지 의심…왕조시대 임금들 부인 여러 명 기록만으로 존재 부정은 단견 '서동설화' 가치·의미 살려야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님을 밤이면 몰래 품고 간다.
서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서동의 꾐에 넘어간 아이들도 부르고, 어른들도 불러 당시 신라의 수도에서 최신 유행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 노래가 신라의 시장과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고 상상해 보라. 서동은 선화공주를 꾀어내기 위해 당시 적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에 잠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아이들이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틉틉한 토주에 취한 사내가 정인을 그리워하며 불렀을 법한 내용이다. 물론 토주에 취한 사내는 서동이었고, 서동은 자신이 부른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을 것이다.
이 노래에는 관음증을 자극함과 동시에 지배층을 조롱하는 질시가 담겨 있다. 시장 거간꾼과 주막 등지에서 이 노래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번져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와 그로인해 발생된 유언비어 때문에 선화공주는 신라의 선량한 백성들은 물론 대신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왕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결국 왕가의 도덕성 실추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선화공주는 쫓기듯이 신라왕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신라왕궁에서 쫓기듯 길을 나선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난다. '마를 캐는 소년'에 불과했던 서동이 이웃나라 공주를 자신의 여자를 만들기 위해 꾸민 계락에 선화공주가 걸려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전설이 시작된다.
동요는 참요(讖謠)적인 성격이 강하다. 참요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일부의 사람들이 퍼뜨리는 노래이다. 따라서 참요는 노래를 널리 퍼뜨려서 사회분위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장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동요는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하여, 즉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일부러 노래를 퍼뜨리고 다닌, 참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동설화의 이야기 맥락으로 보면 서동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계기로 왕위까지 오르게 된다. 즉, 선화공주와의 결혼이 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전설이 의심받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9년 1월 19일에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백제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사리장엄구를 1370년 만에 발굴했다고 발표하면서 유물 683점을 공개했다. 사리장엄구 발굴과 함께 서동설화의 진위성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게 된 내력이 새겨진 金製舍利奉安記(이하 '사리봉안기'라 약칭함) 때문이다. 금판에 193자가 적혀 있는 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을 해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서동설화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미륵사와 서동설화와 관련한 주제로 학술대회가 연달아 개최되었다. 그리고 언론매체와 연구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30여 편이 넘는 논고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서동설화에 대한 진위성 논란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진위성 논란의 핵심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발굴된 "金製舍利奉安記"에 대한 동국대 김상현 교수의 번역문> 여기서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이란, 639년 1월 29일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발굴된>
첫째, 미륵사의 창건 시기가 서기 639년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는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인 600~641년과 일치한다. 무왕이 죽기 2년 전이다. 따라서 그간의 여러 추측과 억측들이 난무했던 미륵사 창건 시기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된 셈이다.
둘째,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의하면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부인의 소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 명시되어 있고, 미륵사를 세우게 한 것도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서동설화에 나오는 선화공주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으며, 설령 실존 인물이었다 해도 선화공주는 미륵사와 무관할 것이라는 추론이 득세하는 형국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논의 또한 적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서동설화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대략 세 가지 관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즉, 역사학적 관점과 불교 사상적 관점, 국문학적 관점이 그것들인데,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달랐다. 그런데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서동설화의 역사적 진위성의 논란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이러한 까닭에 서동설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해석학적 가능성들이 축소된 면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들은 서동설화의 내용 구성방식에서 기인한다. 서동설화는 서동의 출생과 선화공주를 얻기까지의 과정(문학), 무왕과 미륵사 창건에 대한 내용(역사), 지명법사의 역할과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사상적 배경(사상)으로 구성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의 내용도 사상, 역사, 문학적인 요소들의 조화로 구성되어 있다. 서동설화와 사리봉안기는 내용이 매우 유사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방식은 당대에 일반적인 형식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즉 당대인들은 사상과 역사와 문학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이들을 통합해 하나의 진실을 구성하는 도구로써 이야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 학제간 통섭적 시선 필요
실제로 서동설화가 실린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위해 일연은 세 종류의 책을 참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옛 책(古本)', '삼국사(三國史)', '전(傳)'이다. 즉, 일연은 역사적인 사료(귀족의 입장)를 참고하면서 민간의 이야기(문학)에 접근하고, 사상적 입장(불교철학)을 더하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입체적으로 구성해서 서동설화를 서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의 세례를 받은 근대적 학문체계는 학제간의 경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 쇄말화 되어 가는 학문적 경향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제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현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통섭'이라 불리는 이러한 방법론은 보다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런 종합적 인식론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서동설화와 사리봉안기의 이야기 구성 형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서동설화 뿐만 아니라 사리봉안기도 역사, 문학, 사상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동설화를 역사적인 관점만으로 이해하려 들면 종합적인 인식에 이르기 어렵다.
한편 역사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노에 게이치의 언급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노에 게이치는『이야기의 철학』에서 과거의 사건은 그 위로 겹겹이 퇴적된 시간의 퇴적층을 통해서 밖에 인식될 수 없다고 보았다. 곧 기억되고 상기되는 것은 정확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해석학적 변형과 해석학적 재구성으로 이루어진 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은 절대불변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이야기의 집성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동설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학제간의 통섭적인 시선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백제 귀족의 딸이 무왕의 왕비로 기록되어 있을까? 사리봉안기에는 백제의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왕비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는 허구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선화공주는 미륵사창건과는 무관하다는 주장도 더불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리봉안기의 기록만으로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다. 왕조 시대의 임금들은 부인을 여러 명 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은 무왕의 여러 왕후 중의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5권 무왕조(條)에는 "무왕 39년(서기638년) 봄 3월에 왕은 빈(嬪)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을 통해 무왕에게는 정비(正妃)와 빈(嬪)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즉 무왕의 왕비는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사는 3원(院), 3탑(塔)의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륵사의 중원은 선화공주의 주도하에, 그리고 동원과 서원은 사택황후의 주도하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혹은 선화공주가 일찍 사망하고 사택적덕의 딸이 두 번째 왕비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볼 때는 새롭게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서동설화의 내용과 상치된다고 볼 수 없다. 장용수 문화전문시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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