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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의 추억

자취하며 많이 굶기도 하고 밤 늦게까지 돌아 다니지만 그러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 정 상 석

 

전북대신문 편집장

얼마 전 새벽이었다. 자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밥이 먹고 싶었다. 말 그대로 밥. 요새 밥을 너무 못 먹었다. 자취방에 반찬은 떨어진지 오래다. 일주일째 시리얼과 라면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왔다. 몸이 스스로 결핍을 느낀 것인지, 그날따라 유난히 밥을 먹고 싶었다. 싱크대 밑을 뒤졌다. 쌀이 없었다. 사실 없는 걸 알면서도 뒤졌다. 밥할 때 섞어 넣던 현미와 잡곡만 조금 있었다. 심난한 얼굴로 여기저기 들춰봤다. 그림자 짙은 구석에 쌀이 담긴 페트병이 보였다. 예전에 엄마가 가져가라고 싸주셨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너무 반가웠다.

 

밥을 했다. 쌀을 한 컵 넣고 현미 반 컵, 잡곡 반 컵. 왠지 성에 안차 쌀 한 컵을 더 부었다. 씻고, 씻고, 씻었다. 쌀뜨물을 버릴 때 떠내려가는 몇 톨이 참 아까웠다. 내 손등을 가볍게 적신 그것은 밥통으로 들어갔다. 잠깐 불렸다. 그리고 취사. 뿌연 수증기는 익숙한 냄새를 풍기며 방을 가득 채웠다.

 

맛있었다. 보온, 취사 말고는 다른 기능이 없는 싸구려 밥통으로 지었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반찬은 없었다. 고추장을 꺼냈다. 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볐다. 우걱우걱 퍼먹었다. 맛있었다. 고추장은 곧 없어졌다. 밥 반 숟갈을 들고 고추장통 바닥을 긁었다. 그마저도 없어졌다. 그냥 밥만 먹었다. 밥이 달게 느껴질 때까지 씹고 또 씹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물을 병째 들이켜고 숟가락을 또 입에 넣었다. 숨이 막히고 기침이 나왔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외로움과 서러움의 중간쯤. 통학했을 때, 기숙사에 살았을 때, 장학숙에 있었을 때는 느낀 적 없는 감정이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족하진 않았던 삶이 자취를 하면서 깨졌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일을 하는 대가로 용돈을 포기했다. 대학신문사 활동도 끝나서 수입이 거의 없었다. 저번달은 여기저기 글을 기고해서 받은 18만5000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대학언론인을 대표하는 단체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느라 알바할 시간이 없었다. 긴축재정이었다. 가장 먼저,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 부실해졌다. 반찬이 있었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반찬이 없으니 라면은 거의 매일 먹었다. 시리얼을 잔뜩 사서 우유에 홀짝홀짝 말아먹기가 부지기수였다. 도시가스는 뭐 이리 비싼지,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보이는 냉골에서조차 보일러는 틀 엄두도 못 냈다. 라면 끓일 때, 세수할 때는 커피포트로 데운 물을 애용했다.

 

내가 꿈꾸던 자취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환상은 가차 없이 깨졌다. 하지만 난 이 상황에 감사한다. 자취생활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절약과는 거리가 멀던 내가 자취를 하면서 절약을 배웠다. 절약은 절박함에서 나왔다. 생활의 지혜가 부족해서 놓치는 것도 있겠지만 나름 아끼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수록 날마다 어른이 돼가는 것을 느낀다.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자취하길 잘했다는 것.

 

많은 학부모들은 대학생이 된 자녀들이 자취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자주 보지 못하고 안전이 걱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잘 챙겨먹는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데 대한 불안감도 한몫한다. 너무 걱정할 필요없다. 좀 굶을 수 있다. 돈을 흥청망청 쓰기도 하고 밤늦게 다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대학생이라면 자취는 한번쯤은 해봐야한다. 그것이 자취가 내게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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