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蓮)은 3일 동안만 제대로 꽃을 피운다. 첫날은 커다란 꽃봉오리를 여느라 그리 더디다. 둘째 날은 딱 하루만 그가 지니고 있는 우주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추함을 감추려고 서두른다. 하지만 비록 꽃이 피어있는 기간은 짧으나 그의 향기(蓮香)는 꽃이 피기 전부터 안개처럼 은근하게 연못을 메운다.
그러다가 성급한 마음에 미리서 찾는 이들에게는 슬며시 스며들어 청정한 여운을 전한다. 그러면 그 여운은 모두를 한동안 마비의 성 안에 가두어버린다. 진흙탕 속에서도 순결하게 처연히 일어서는 자태, 아무 것도 없는 무(無)였다가 완전한 코스모스(cosmos)의 오묘함을 발하는 그를 오죽하면 예로부터 ‘화중군자(花中君子)’라 했을까.
덕진 공원에서는 해마다 연꽃 축제가 열린다. ‘덕진채련(德津埰蓮)’은 조선시대부터 전주 8경의 하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연꽃 축제의 효시라고 할 정도로 전국에 이름이 났었다. 단오 때면 이곳에서 용왕제 성격의 물맞이 행사가 성대하여 대관령 산신제인 강릉 단오제와 견줄 정도였다. 지금은 덕진공원과 채련공원이 분리되어 있는데 채련을 체련(體鍊)으로 잘 못 알고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은 문화축제로서 창포나 그네 대신 다양한 행사를 하는데 그래도 연꽃축제이니 연꽃이 주인공이다. 연지(蓮池)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신비스런 여인이 혼자 살면서 한여름 며칠만 잠깐 고고하게 나타나는 데 바로 이것이 덕진채련이다.
파울로 코옐로는 〈연금술사〉에서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존재 자체를 느끼라는 말이다. 또한 단 두 방울의 기름일지라도 거기에 이르는 노력과 희생을 새기라는 뜻이리라. 화려한 꽃축제를 불 밝히기 위해 인내한 연의 통과 의례들, 숨은 진실을! 밀도 높은 진흙 속에서 숨 쉬기 어려워 그 뿌리는 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고 대궁도 속이 비었을까.
심오한 호흡을 통해 저절로 침투된 연향의 그윽함은 내 깊은 곳까지 닿는다. 몸을 던지면 금방이라도 받아 낼 것만 같은 넉넉하고 꼿꼿해 보이는 잎과 천상선녀가 앉은 듯 한 풍채는 가슴을 활처럼 휘게 한다. 한데 세상 모든 게 그러하듯 그 화려함의 또 다른 이름처럼 짙은 어둠과 적막의 쇠사슬이 검은 연실로 박혀 있다. 그런 걸 신비라 하던가. 마치 깊은 산사에서 들리는 북 울림으로 나를 에워싸며 원초적 고독을 느낀다. 동시에 생의 환희가 새삼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친다. 나는 향연의 기운에 흠뻑 젖는다. 오랫동안 잊고 산 생명의 의미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겨울가고 또 다른 봄을 그린다. 연꽃은 당연함으로 사는 인생길에, 잠깐 낯선 설렘을 주고 다시 진흙으로 스러진다. 간절한 염원으로 만난, 바람과의 한 순간 스침으로 꽃의 존재는 꺾인다. 이제 연은 본연으로 돌아가 우주와의 교감하겠지. 그 깊은 진흙 속에서 까마득한 땅 밑의 울림을 품는다. 그리고 한 줄기 촉각으로 하늘에 귀 기울인다. 그러면 언젠가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누가 감히 그런 기약을 자신할 수 있으랴.
서정주님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처럼 그리 섭섭지는 말고, 또 그렇게 애절하게는 말고 담담하게…
그러면 언젠가 또 마주침의 연이 오지 않겠는가.
△수필가 이민숙 씨는 〈좋은문학〉으로 등단. 현재 전북대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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