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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윤 문인 〈약무호남 시무국가〉 실증소설 출간

"전주 지킨 웅치전투 대첩으로 승격해야"

▲ 이목윤 문인이 웅치·이치전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충무공 이순신이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글에 들어 있던 말이다. 그리고 이목윤 문인이 국가와 자치단체, 지역민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하다.

 

이목윤 문인이 3년 간의 자료·현장 연구 끝에 임진왜란의 웅치·이치전투를 문헌·설화·지명으로 풀어낸 실증소설 <약무호남 시무국가> (신아출판사)를 펴냈다.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 7월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과 병사들이 전주로 진격하려던 왜군과 격돌해 조선이 대승을 한 전투다. 웅치는 지금의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일대, 전주 금상동 일대다.

 

웅치 전투는 일본군에게 첫 패배를 안기며 조선군에게 승리의 희망과 자신감을 키워줬다. 또 대전 사상 처음으로 한 병사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목숨을 던진 전투로 그 사명감과 신념을 높이 살만 하다.

 

역사적으로도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은 <백사선생별집 권4> 에서 웅치전투의 전공은 행주의 공보다 크다고 했고, 유성룡은 <징비록> 에서 전라도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웅치전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은 초라하기만 하다. 웅치는 ‘웅치전적비’만이 벌판을 지키고 있고, 이치는 손바닥만 한 땅에 비석 몇 개가 서 있을 뿐이다.

 

이 문인은 웅치전을 대첩으로 승격시키고 현장을 성역화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웅치전투는 7월 7일 웅치골 입구의 전초전부터 날과 장소를 바꿔가며 8일 웅치, 9일 구진벌이, 10일 안덕원 등 사흘간 안덕원에서 대승동까지 대승한 전투다. 그는 ”여러 날 장소를 바꾸면서 싸웠기 때문에 ‘웅치대전’이 되고, 적은 병서로 큰 부대를 물리쳐 승리한 전투기 때문에 ‘웅치대첩’이라고 해야 옳다“고 말했다.

 

제주 4·3공원, 칠백의총, 황토현전적지 등 성역화 유사사례를 들며 웅치 성역화 방안도 제안했다. 민가가 적은 산림지대기 때문에 도유림과 구 도로를 활용해 문화공간, 공원 등을 조성하는 것도 대안이다. 나아가 방어진지의 원형을 복구하고 병사들이 오고 간 길을 표지해 순례길을 조성할 수도 있다.

 

더불어 소양면 소재 ‘신교리’를 ‘신조리’로 바꾸는 등 웅치대전에 관계된 지명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바뀐 곳들의 이름을 복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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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 kbh768@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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