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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유물로 읽는 옛 이야기] 김제 대목리 출토 부처상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
김제 대목리 출토 판불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던 물건이었을까? 제일 큰 것은 약 7.7cm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아주 작아, 자세히 들여다봐야 부처와 보살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나 작은 네 개의 판불에는 아주 큰 세계가 담겨 있다.

이 네 개의 판불은 1980년 김제 대목리(大木里)의 한 밭에서 출토되었다. 여래좌상(如來坐像)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각각 본존으로 한 삼존상(三尊像), 4명의 보살, 승려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래삼존상은 협시보살까지 모두 좌상(坐像)으로 표현된 매우 드문 예이다. 반가사유상은 좌우에 승려상이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다. 부처와 보살의 얼굴 묘사 등 표현 양식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크게 유행했지만 이러한 도상배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하는 독특한 도상으로,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불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도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요한 국가적 통치 이념으로 도입되었으며, 특히 삼국 중에서도 백제는 동아시아 불교문화 교류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문화는 백제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배경에는 당시 백제가 선진문물을 수입했던 중국에서 불교문화가 대대적으로 융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상들은 기존에는 압출불(押出佛, 동판을 대고 두드려 만든 부처상)을 제작하기 위한 청동 원형 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과학적 분석을 한 결과 청동 원형 틀이 아니라 금동 부처상임이 밝혀졌다. 이 판불들은 원래의 봉안 상태를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예로 일본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나무 천개를 장식했던 것처럼 소형 감실 내부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혜영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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