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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만난 작은 이웃들의 마음

임주아 물결서사 대표·시인
임주아 물결서사 대표·시인

선미촌으로 출근하는 토요일, 불 꺼진 유리방들 사이 좁은 골목길을 지나 책방 문을 연다. “아이고, 왔어?” “잘 지내셨어요!” 책방 옆집 할머니들과 인사를 주고받아야 비로소 책방에 도착한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사이는 시간보다 마음에 비례하는 걸까.

지난 봄날엔 마당에 나가 국숫집 할머니가 끓여온 국수를 함께 먹었다. 고물상할머니가 주신 빗자루로 책방 바닥을 깨끗이 쓸었다. 할머니가 고물을 주우러 가거나 병원에 가는 날이면 할머니가 ‘아들’이라 부르는 강아지와 골목을 산책하기도 하고, 국숫집 할머니가 종종 휴대폰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날에는 휴대폰 속 중복된 아들 이름이나 세상을 떠난 이름을 지워드리기도 했다. 이웃이라는 말과 멀리 떨어져 걷던 시간들이 점점 가까이 회복되는 책방에서 나는 조금씩 동네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깊은 잠에 빠진 낮의 선미촌 건물 사이, 골목골목 책방으로 찾아들어오는 손님들 중에는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아주머니가 있다. 골목 끝에서부터 부릉 소리가 나면 오셨나보다, 하고 기다리게 되는 손님. 책방에는 새 책을 판매하는 조금 넓은 공간과 헌책을 사거나 빌리고 기증할 수 있는 작은 공유책방이 있다. 손님들이 한권한권 기증한 책들이 모여 어느새 꽉 찬 다락같은 방이 된 이곳에 이 아주머니가 단골이 됐다.

그는 끈으로 단단히 묶은 책들을 내려놓으며 “좋아하는 책만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의 목록엔 브레히트 시집도 있고 5·18 기록을 담은 책도 있고, 과학 이론 서적도 있다. 나는 이 범상치 않은 목록도 좋아하지만 그가 빨간 헬멧을 쓰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것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 골라두었다가 끈으로 묶어 실어오는 마음. 차곡차곡 담아 망설임 없이 한곳으로 직행하는 마음. 책끈을 풀어 한 권 한 권 진열할 때마다 문득 겸허해졌던 건 그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 책을 정기적으로 빌려가는 주민도 생겼다. 그냥 빌려가는 게 미안하다며 꼭 박카스 한통을 사들고 오는 동네 아저씨는 “마지막장을 넘기는 게 너무 아깝다”는 독서광이자 다독가다. 그는 책방에서 빌려간 책들을 주민 세 명과 돌려보며 함께 읽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최근 알려주기도 했다. 어떤 책을 가져가면 다같이 좋아할까 궁리하며 책을 고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선미촌에 과연 어떤 공간이 있어야 이들이 기쁘게 살아갈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고민은, 책방이 두 달에 한 번 정하는 주제와 내용으로도 연결됐다. 지난 6월 ‘이웃은 그 자리를 지켰다’를 주제로 서노송동에 사는 젊은 성악가의 데뷔콘서트를 열어 주민과 예술가들과 함께한 책방은 퍽 다정하고 행복했다. 생존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이웃으로 주제의 폭을 넓혀오는 동안, 이곳을 찾는 이웃들은 선미촌에 책방에 있어야할 이유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것이 있다.

/임주아 물결서사 대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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