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 조합원 소해진
전주에 노동청이(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여기 있었구나. 지인이 퇴사한 곳에서 사장이랑 임금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어 노동청에 방문했다. 난 지인의 동료 시민으로 심리적으로 힘을 보태기 위해 동행했다. 일상적으로 근로 상실 신고, 이직 확인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진북동에 위치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갔던 터라, 당연히 같은 곳이라고 짐작했으나 노동청은 다른 곳이었다. 문득 정부 부처(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센터 이름을 두고 상념에 잠긴다. ‘고용복지’라는 워딩에서 정치적 입장 같은 게 만져진다. 다름 아닌 고용주의 입장에서 ‘일’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으로 ‘복지’를 얘기하니,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과 ‘노동복지’를 실현하는 일이 이토록 멀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그 노동자로 살아가는 무게는 노동청을 방문하는 우리의 표정으로 알 수 있다. 사진으로 그 그 표정을 찍어두었다면, 100년짜리 놀림감이었을 것이다. 잔뜩 회색빛 구름처럼 겁을 먹은 체 쫄아 있었다. 사업주와 대질을 하는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단기직 노동자가 노동청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갖고 있었겠는가. 그러나 우려와 달리 대질은 하지 않았다. 신고 경위와 사실 관계 확인(주휴수당 연장수당 월차수당 미지급, 휴게시간 확인 등), 쟁점 사항 확인하고 조서를 작성하였다. 예상외로(?) 근로감독관은 공정한 태도를 보였으며, 당사자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었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바로 접한 기사는 근로감독관의 갑질에 관한 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일터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곳일까? 나는 주로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였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 선임한테 들었던 가장 노골적이면서, 적확했던 조언은(?) ‘까라면 까라’ 것이었다. 나는 직장이라는 지리적인 공간보다 그곳에서 통용되는 의사소통 방식과 문화에 관심이 많다. ‘까라면 까라’ 이것은 전형적인 군대식 문법이다. 군대식 문법은 대다수 조직 사회에 통용된다. 타인과의 관계를 수평적 동료 관계가 아닌 수직적 위계질서로 이해하고 힘의 관계로 지배한다. 그것을 거스르기 위해 애쓰지 않는 곳이라면 예외가 없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디피> (D.P.)가 한창 뜨고 있다. 군대에서 도망친 탈영병을 잡는 헌병 군탈체포조 이야기다. 드라마 댓글 창에는 왜 그토록 많은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 성토하는 글이 많은데, 전에 없이 충분히 공감했다. 그토록 강력한 폭력과 억압의 기억이라면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드라마는 군필자의 경험을 자랑삼아 전시하거나 특권화하지 않는다. 김보통 작가는 <디피> 는 ‘왜 그들이 탈영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이제는 (군대 현실이)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성찰한다. 그리고 피·가해자의 둘만의 문제가 아닌 폭력이 존재하는 사회 현실을 방관 혹은 목격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소환하여 ‘책임’을 지운다. 디피> 디피>
지인이 겪는 직장 내 갈등 또한 수당 미지급 문제만은 아니었다. 조직 문화 안에서 다른 목소리를 냈을 때 우회적인 방식의 배제와 미묘한 성차별이 있었다. 군대식 강압적인 폭력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폭력과 차별의 기제는 동일하다. “주방에서 일할 때 쓰는 조리사 모자가 있는데, 여자는 낮은 거 써도 괜찮은데 남자가 낮은 거 쓰면 좀 그렇다.”거나 “수시로 울리는 단체 카톡방에 답장을 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단톡방에서 나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든 존재하는 ‘먼지 차별’이라고도 표현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미묘하다고 해서 차별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싸우는 당사자 곁의 사람으로 이 일을 거치면서 새롭게 배웠다. 갑을 관계에서 폭력과 차별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을의 위치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몫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싸움 이전의 단계에서 긴장과 조정의 단계를 거쳐, 싸움을 예방하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한다. 이는 동등한 힘의 관계에서 가능하지만, 권력 차이가 날 때는 싸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방적으로 지는 경우가 많다. 갈등이 증폭되어 싸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때, 관계는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파편화된 관계는 외롭고, 두렵고, 힘겹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싸우는 동안 이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자기 불안과 의심에 시달린다. 경계를 침해받았을 때 분노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지만,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곧잘 환원된다. “네가 예민해서 그래. 너만 생각하는거 아냐?”라는 통념은 힘이 세서 피해자를 쥐고 흔든다. 사회적 약자(노동자)를 위한 권리 는 취약하고 언어는 빈곤하다. 드라마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 조합원 소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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