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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한 편의 시가 품은 인생 서사

장석주 시인

인류사는 실패의 여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실패의 여정은 인생 서사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실패는 우리 안으로 침잠해서 머물며 우리 의지를 꺾고 부러뜨린다. 우리는 실패에 꺾이지 않을 도리는 없는데, 그건 인간에겐 실패할 시간이 유한하고 실패에겐 시간이 무한으로 주어지는 까닭이다. 인간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실패를 겪으며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것에 길들여지며 자연스럽게 스톡홀름 신드롬 같이 실패에 친화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겪어보니, 인생에서 실패란 일상범백사 중 하나다. 우리는 패배를 반복하며 실패로 얼룩진 인생 서사를 빚는다. 우리 실패의 대부분은 예정된 것이지만 실패에서 딱히 배울 건 없다. 실패가 개인에게 상징 자산일 수는 있지만 실패가 스승이란 말은 믿을 수 없는 헛소리다.

지난주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치러진 특별한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광화문 글판에 35년간 게시된 아름다운 시편들 중 독자 2만2천500여 명이 최고의 시를 뽑았는데, 졸시(拙詩) ‘대추 한 알’이 선정되었다. 마침 계절이 대추 수확철이라 그런 행운을 잡은 것일까? 문인과 독자 300명이 한데 어우러진 자리에서 기념패와 ‘대추 한 알’이 표지에 실린 기념도서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받았다. 애초 시가 실린 ‘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는 절판된 지 오래이고, 현재 전문은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난다)에서 볼 수 있다.

급류처럼 흐른 시간 속에서 갈팡질팡 하는 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품 안을 떠났다. 환몽처럼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며, 모란과 작약을 키우듯 자식들을 살뜰하게 키우지 못한 내 처지를 관조한 끝에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빚은 소동이 전 휘몰아치던 어수선한 해를 보낸 그 이듬해 8월 말, 서울살림을 접고 시골로 이사를 단행한다. 내 나이 마흔 중반이었다.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트럭 백여 대 분량의 마사토를 쌓고 다진 뒤 작은 전원주택을 지었다. 농협 융자금으로 지은 이 집이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사림 터전이 될 터였다. 닷새마다 서는 안성 장마당의 나무시장에 나가 유실수를 사다 주변에 꾸역꾸역 심었다.

나는 실패에 꺾인 채 변방으로 밀려난 방외인, 실패의 하염없는 부역자이자 패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동안 그런 궁색한 처지에서 유실수를 구해다 심는 마음에는 인생 서사를 새로 쓰려는 열망 한 줌이 있었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적적한 시골 살이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노자와 장자를 끼고 살며 심경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그 변화의 중심에 굳이 이기려고 들지 않는 한결 어질고 유순해진 마음이 있었다. 마음은 담담하게 슬퍼할뿐, 언제든 나를 이기려 드는 것들에게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랬더니 내 삶에 번잡과 소동이 줄고 나중엔 놀랄 만큼 주변이 고요해졌다.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굴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졸시 ‘대추 한 알’ 전문)

몇 해 지나 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보리수 따위 유실수에 드문드문 열매가 달렸다. 그건 자연이 만드는 찬란한 마술 같았다. 2003년 가을 어느 날 대추나무에 매달린 붉고 둥글게 익은 열매 일곱 여덟 알을 눈으로 헤아리며 찰나에 스친 이미지와 감동을 붙잡아 시에 담았다. 시는 찰나에 오는 것을 포획한다. 시는 내 상상력이 빚은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운 좋게 붙잡을 따름이다. 고작 여덟 줄 시가 세상에 나아가 이토록 오래 읽힐 줄은 감히 예측하지 못 했다. 스물 몇 해가 지나 다시 읽으니, 이 시에는 내 인생 편력과 견딤의 세월이 남긴 오롯한 진실 몇 개가 들어 있다. 부러진 뼈가 살갗을 꿰뚫고 불거져 나오듯이 진실은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늦된 사람이라 이 깨침도 아주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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