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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사이

수필가 안 영씨는 1997년 로 등단했다. 수필집 「내 안에 숨겨진 바다」가 있다.

▲ 안 영
시월을 빼앗긴 밤에 비가 내렸다.

 

가을의 긴 옷자락 끄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새벽 길가로 나가보았다. 밤새 나무들은 뭔 일이 있었는지 팔이 부러지고 모든 옷을 벗어던지며 길가에 아무렇게 누워있었다. 아직 벗지 못한 나무들은 속옷차림으로 우리들에게 모든 걸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다 아름다웠다.

 

자동차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쓸어내리며 예쁜 낙엽에 푹 빠져있었다. 신의 작품인 가을은 낭만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한동안 낙엽에 끌려 출근 할 시간을 잊고 있다가 정신없이 뛰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말했다. 우리 집에 오빠가 곧 도착할거라고 하였다. 이른 시간에 웬일일까? 하얀 겨울을 풍성하게 지내라고 형제들에게 나눔으로 쌀 한 가마씩 선물로 준비하셨단다. 집집마다 선물하려면 아홉 가마의 쌀이 필요하다.

 

퇴직 후 취미삼아 공터에 농사를 짓고 삶의 질을 높이는 오빠의 가슴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나보다. 벽에 기대어 옆구리 터지게 살찐 쌀자루를 바라만 봐도 푸짐하고 배가 부른 것 같다.

 

우리형제들은 지난여름에도 큰 행복을 누린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태어나 뼈가 굵어진 마당이 넓은 집을 팔고 읍내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 혼자 사시기에 관리가 어려운 큰집이라서 할 수 없이 매매를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오빠가 다시 구입하여 어느 별장보다도 멋진 집으로 꾸몄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밤, 어린 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들의 가슴둘레가 커져갔는데 다시 유년시절의 마당과 토방 그리고 흙담집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시절에 이불을 잡아당기며 잠자던 소녀들이 이젠 언니동생이 모두 흰머리가 되어, 멀리 달아난 세월의 이불을 덥고 그 방에 나란히 누웠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엄마냄새를 맡으며 오빠가 키운 살찐 닭을 삶아놓고 밤새 도란거리면 푸른 별들도 자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굴 위하여 그 집을 지키려하는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들이 백 마리의 양을 채우기 위해 한 마리의 양을 욕심내는 일이 많다.

 

한가마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쌀가마를 서울로 각 지방으로 실어 나르는 오빠의 조건 없는 사랑에 눈시울이 뜨겁다.

 

쌀의 개수만큼 고마운 오빠를 생각하는 날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낙엽을 바라보며 혹시 꿈인가하여 쌀가마를 바라보니 꿈은 아니었다.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풀들은 서로 손을 잡아주고 버텨 주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누르는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오빠의 일으킴은 새로운 변신이었다.

 

이쯤, 쌀가마를 메고 사랑을 배달한 오빠의 허리에 무리가 없을까? 가을과 겨울사이에 나에게는 진귀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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