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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을 득한 연후

우리말의 대략 70%는 한자어다. ‘사랑하다’, ‘귀엽다’, ‘바쁘다’ 같은 용언은 순우리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시나브로’ 같은 부사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체언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책상(冊床)’, ‘화분(花盆)’, ‘자동차(自動車)’ 등은 순우리말처럼 여겨져도 본디는 한자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순우리말’의 ‘순(純)’도 한자어다.)

 

한자어는 크게 두 가지다.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거나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 그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게 불가능하거나 우리말처럼 쓰고 있으니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말이다.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한자어는 대부분 어렵거나 낯설다. 반대의 경우는 그야말로 순우리말처럼 쓰인다.

 

‘본 장소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의 무단 투기 행위를 금합니다.’를 보자. 이 문장에 쓰인 ‘연탄(煉炭)’이나 ‘음식물(飮食物)’의 경우는 본디 한자말이지만 순우리말처럼 쓰인다. 다른 말로 바꾸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본(本) 장소(場所)’는 ‘이곳’, ‘무단(無斷)’은 ‘함부로’, ‘투기(投棄) 행위(行爲)’는 ‘함부로 버리기’, ‘금(禁)합니다’는 ‘마십시오’와 같은 순우리말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 앞서 보았던 문장을 ‘이곳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오.’와 같은 식으로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필히 허락을 득한 연후에 입실하십시오.’와 같은 문장은 숫제 ‘기미독립선언서’와 거의 동급이다. ‘허락(許諾)’은 순우리말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필(必)히’, ‘득(得)’, ‘연후(然後)’, ‘입실(入室)’은 다르다. ‘반드시 허락은 받은 다음에 들어가십시오.’라고 쓸 수 있다. 그림처럼 ‘반입금지’니 ‘미착용시’ 같은 한자어도 즐겨 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가방끈이 긴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서일까. 작고하신 박동진 명창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아주 오래된 광고 카피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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