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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같은 술비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여러 날 묵었으니 이제 좀 가주었으면 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주인이 지나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 이제 그만 가라고 가랑비가 때맞춰 오시는가?” 그 소리를 듣고 손님이 슬그머니 맞장구를 쳤다. “아, 더 있으라고 오늘은 이슬비가 내리는구나.”

 

몰라서 그렇지 가랑비와 이슬비는 다르다. 가랑비는 이슬비보다 물 알갱이가 굵다. 빗방울이 가장 가는 게 ‘안개비’다. 그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를 ‘는개’라고 부른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채찍처럼 굵게 쏟아지는 ‘채찍비’, 더 거세게 내리는 건 ‘작달비’다. 물을 퍼붓는 듯한 ‘억수비’는 ‘장대비’와 거의 같다.

 

내리는 조건이나 모양에 따른 이름도 있다. 소낙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 ‘여우비’는 햇볕 밝은 한낮에 잠깐 뿌리는 비를 일컫는다. 호랑이 장가간다고 하는 바로 그 비다. 겨울철,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눈보라라고 부르듯, ‘비보라’라는 것도 있다. 빗방울 대신 봄날 벚꽃처럼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건 당연히 ‘꽃보라’다.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건 ‘꽃비’이고, 비가 오기 시작하는 걸 알리느라 미리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리키는 말은 ‘비꽃’이다. 무더운 여름 한나절만이라도 고단한 농사일에서 잠시 놓여나 낮잠이나 푹 자두라고 내리는 비는 말 그대로 ‘잠비’다. 가뭄에 ‘단비’의 뜻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사시사철 비만 내렸다 하면 마음이 설레는 사람들이 있다. 술꾼들이다. 그들 대부분의 가슴에 그득한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술비’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가랑비든 장대비든 잠비든 꽃비든 모두 단비 같은 술비인 것이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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