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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째보선창

김철규
김철규

군산 내항에는 ‘째보선창’과 ‘빨간 등대’ 하나가 있다. 군산 금암동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에 다리를 놓고 사람들과 자동차도 다니고 있는데 금강의 수변이 언청이 모습을 했다고 하여 째보선창이라는 닉네임이 붙으면서 한 세기를 풍미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군산 하면 째보선창이라는 대명사 하나가 따라다닌다. 또한 째보선창 바로 앞에는 일본인들이 개항을 하면서 빨간 등대 하나를 세웠다. 이 빨간 등대는 군산항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금강 하구인 내항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들에게 위험한 지역이니 조심하라는 신호의 표시로 빨간 등대를 세운 것이다.

이 째보선창은 군산항의 역사와 함께 숱한 사연을 담고 있다. 나는 군산유학의 첫 번째 하숙집이 째보선창가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친과 교분이 있는 ‘고군산’ 하숙이라는 여인숙 뒤편 방에서 하숙을 했는데 학교를 오갈 때면 매일 째보선창을 거쳐야 했다. 곧 집 안마당 역할을 한 것이다.

째보선창가에는 군산수협의 수산물 공판장이 있어 조수가 낮은 ‘조금’이 되면 수많은 수산물로 뒤덮여 비린내가 진동을 했었다. 생선을 팔려는 사람들과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하루가 지나고 이침 해가 뜨면 길가에서 뱃사람들이 쓰러져 잠자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한 겨울을 빼고는 봄, 여름, 가을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군산항이었다. 이처럼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산항 선창가의 애환이 서린 째보선창이다. 태어나고 살고 죽고 생사고락을 같이한 째보선창은 군산이라는 항구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1990년대에 이르면서는 주인 잃은 헛간과 같이 적막만 흐를 뿐이다.

그토록 문전성시를 이룬 째보선창은 그 이름마저 시들어 가고 있어 그 흔적이라도 남는 기념물이 들어서 주기를 속없이 기대해 본다. 특히 필자의 사춘기시절을 보냈던 째보선창이기에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나있는 추억 이야기를 꺼내 그 시절을 더듬게 하고 싶다. 또한 칠흑 속의 어둠을 밝혀주는 빨간 등대도 군산항을 찾는 선박들만이 아니라 낭만에 젖은 청춘들에게는 더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금강 하구언에 유일한 이 빨간 등대는 사랑에 불타는 청춘남녀들에게 때로는 등댓불처럼, 때로는 빨간 정열의 불이 되어 인생의 활로를 가능케 해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낭만 속의 하염없는 사연을 지닌 채 불만 반짝일 뿐 휴업상태다.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수변도로에 공사가 한창이지만 누구에게도 멋진 친구가 되어 주고 추억을 한 아름 안아주며 희비쌍곡선을 그어준 ‘째보선창’과 ‘빨간등대’의 추억은 간데없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 물과 함께 화려했던 시절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그러나 째보선창과 빨간 등대는 아직 자신을 지켜내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맛과 멋과 낭만이 넘실거리는 옛 군산항의 이미지를 살리는 요지(要地)로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금강과 운명을 함께할 째보선창/그리고 빨간 등대/추억을 머금게 하는.../당신들은 우리 군산의 영원한 동무/꿈틀거리는 새싹으로 피어나야 할 사랑/나는 오늘도 당신들을 안고 싶소.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라북도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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