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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촌 봄나들이

백봉기 수필가

백봉기
백봉기 수필가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어느덧 새생명들이 자리를 잡는다. 산언저리 과수원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정원에 도열한 나무들도 기지개를 켠다. 엊그제는 개나리와 매화가 모습을 보이더니 오늘은 산당화가 고개를 내민다. 이곳저곳 물감으로 찍어놓은 듯 환하게 피어오른 건지산의 꽃 무리가 시선을 강탈한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나. 여기저기 툭툭 터지는 하얀, 빨강, 노랑 불꽃들의 아우성쳐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렵다.

4월,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을 누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꽃에 홀리고 바람에 취하고 대지의 용틀임에 정신이 몽롱해지기 때문인지.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래, 나가자! 발길 닳는 곳이 봄이고, 꽃이고, 인연이 아니겠는가. 차를 몰고 고산천을 들러 삼례쪽으로 가니 봄내음이 향기롭다. 햇빛도 물빛도 하늘빛도 상큼하다. 코로나로 지친 요즘 내 영혼에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차가 멈춘 곳은 비비정마을 전망 좋은 언덕, 이곳은 평범하던 시골마을이 새로운 이색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언덕배기에는 야외공연장과 사방으로 뻥 뚫린 통유리집 카페가 이색적이다. 베란다 아래쪽으로 어느덧 땅심을 받은 애쑥이 포르스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슴이 탁 트인다. 고산천과 전주천이 흐르는 만경강과 호남벌이 품안으로 들어온다. 강둑을 따라 전주 팔복동에서 목천포까지 이어지는 연분홍 벚꽃길이 마치 행군하는 병사들 같다. 때마침 새로 난 전라선 철교를 따라 여수행 열차가 유유히 빠져나간다. 남쪽으로 가는 나들이객들이 차량 가득 몸을 맡기고 있는가 보다. 비비정을 나와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갔다.

이곳은 암흑의 역사가 예술 볕을 받은 곳이다.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생산하는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지은 창고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7개의 낡은 창고들이 제각각 창의적으로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낡은 창고건물에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에 홀린 듯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삼례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 잔인한 4월의 잔영은 여기에도 있다. 낮술에 젖은 여인들, 이들도 분명 봄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리다. 60대 초반쯤 보이는 두 여인, 옆 사람은 의식하지 않은 채 말끝마다 이년 저년 욕설을 퍼붓더니 갑자기 노래를 한다. ‘♪마음 주고 정을 준 게 바보였구나. 사랑을 한 내가 바보였구나~♪’ 아픈 상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애절하고 감정이 깊다. 앞뒤 좌우로 흔들다가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다. 그래 아픔만큼 흔들려라. 맺힌 한 다 풀어라. 소 키우는 걱정은 하지 말고, 마시고 퍼붓고 실컷 가슴 두드려라. 봄이 당신을 다 용서하리다. 나도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서야 내 짧은 봄나들이에 쉼표를 찍는다. /백봉기 수필가

△백봉기 수필가는 <한국산문> 으로 등단해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를 발간했다. 현재는 전북문협 부회장과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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