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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야가 반파국인 이유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실학의 비조인 성호 이익(李瀷)은 최초로 가야의 범위를 전북 동부까지 확장했다. ‘전북가야’의 탄생이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역사서『일본서기』와 중국 양(梁)의「양직공도」, 이 2곳에서만 등장하는 반파국(伴跛國)이 주목된다. 전자에서는 513년~515년까지 3년간, 521년인 후자에서는 ‘반파(叛波)’로 적혀 있다. 6세기 초에 돌연히 등장한 반파국은 521년경 ‘백제 곁의 소국’으로 전락한 후 곧 사라졌다.

그렇다고 반파국은 6세기 초에 생겨나지는 않았다. 지금의 섬진강 하구 하동항을 가리키는 다사진에 대한 지배권 문제와 더불어, 반파국이 기문국을 병합한 데 따른 이해 충돌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반파국은 쳐들어 온 백제와 왜(倭)의 군대를 처참하게 격파했고, 신라의 촌락을 습격해 초토화시켰다. 반파국은 1 : 3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면 백제와 왜 그리고 신라가 반파국과 충돌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3년을 끌 정도로 힘겨운 승부였다. 물론 반파국이 이들 삼국의 이익을 침해했기에 ‘삼국간섭’이 발생한 것은 자명하다.

반파국의 영향력과 소재를 가늠할 수 있는 요체는 섬진강 하구 다사진이었다. 섬진강 물길은 수송로 역할을 했다. 이 무렵 반파국은 봉화망을 운용했다. 통신 수단인 봉화는 경보 체계의 작동을 뜻한다. 그리고 봉화대는 일정한 영역을 전제로 한 단일한 정치체에서 구축 가능한 시설이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110여 곳 봉화망의 종착지는 정치적 중심지인 동시에 봉화를 운영하는 주체였다. 이처럼 광대한 봉화망은 『일본서기』는 물론이고『신찬성씨록』에 적힌 3기문의 영역 300리와 부합한다.

섬진강 하구는 반파국이 남해로 나가는 수송 관문이었다. 이와 연계된 운봉고원과 장계분지에서는 막대한 제철 유적이 확인되었다. 왜까지도 비상하게 신경을 쏟은 전략 물자가 철(鐵)이었다. 당시 반파국은 운봉고원의 기문국을 병합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그러한 반파국의 소재지로는 고총고분과 제철산지가 밀집한데다 봉화망의 종점인 장수를 지목하는 게 자연스럽다.

지금까지는 반파국을 경상북도 성주나 고령으로 지목했었다. 이 설은 숱한 문제점을 지녔지만 몇 가지만 적시한다. 첫째,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 반로국(半路國)이 반파국의 간오(刊誤)라면, 단 한 건의 이본(異本)도 없이 모두 ‘반로국’이라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 둘째, 479년에 가라(加羅=대가야)는 남제(南齊)의 책봉국이었기에 ‘백제 곁의 소국’인 반파국과는 관련 지을 수 없다. 셋째, 반파국은 ‘임나국의 별종(別種)(『釋日本紀』)’이었기에 본종(本種)인 대가야와는 무관하다. 넷째,『일본서기』에서 가라의 훈독은 ‘가라カラ’이지만, 반파는 ‘하헤ハヘ’였다. 양자는 서로 다른 별개의 국가였다. 다섯째, 장수군 일원의 백제 때 행정지명인 백해(伯海)의 『전운옥편』음인 ‘파해’는, 반파 음가인 ‘하헤’와 연결되고, ‘하헤’에 탁음을 붙이면 ‘파헤バヘ’가 된다. 따라서 반파국은 장수군 장계면의 백제 때 행정지명 ‘백해’와 닿는다.

문헌과 물증을 통해 장수가야는 가야의 빅(Big)4인 반파국으로 밝혀졌다. 반파국이 백제와 경쟁하면서 왜에 보낸 ‘진물(珍物)’은 경제력과 독자 교역망 구축을 헤아리게 한다. 천 오백년간이나 묻혀졌던 제3의 가야, 반파국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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