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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의 파편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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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변호사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1심 소송에서 ‘각하’ 판결이 선고됐다. 기존 대법원 판결로 위자료가 인정되어 강제집행까지 하는 마당에 하급심이 엇갈린 판결을 한 것이다. 이 일로 다른 근로정신대나 위안부 관련 소송도 지연되는 등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논쟁은 법원 안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판사 탄핵 국민 청원에 수십만 명이 동참했고, 북한도 ‘천 년 숙적의 손을 들어주었다’며 비난했다. 기존 대법원 판결부터도 재판거래 의혹이 있었고,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운운하며 경제보복까지 할 만큼 외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사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사실 모든 일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라는 잘못 끼운 첫 단추에서 비롯되었다. 그 파편이 튀어 피해자들은 1997년부터 20년 넘게 일본과 한국의 법원을 오가는 ‘인간 탁구공’이 되었고, 협정 관련 문서 공개를 꺼리는 외교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해야 했다. 양국이 서로 책임을 면피하고 전가하기 위한 ‘해석적 곡예’(interpretative acrobatics)를 했던 것도 청구권 협정 때문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이 논리를 쥐어짜 1, 2심을 파기했으나, 끝내 소수 반대의견이 남은 것도, 이번 하급심 판결도 모두 청구권 협정의 파편이다. 그럼에도 협정 체결 당시와 이후의 우리 정부 책임에 대하여는 의아하리만큼 언급이 적다.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피징용 한국인의 청구권 변제’를 요구했다. 이후 협정을 통해 ‘피징용 한국인의 청구권을 포함하여 양국과 그 국민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했다. 그 때 한국이 요구한 12억 달러에는 피징용자에 대한 보상 명목의 3억 6000만 달러가 포함돼 있었다. 생존자당 200달러, 사망자당 1650달러, 부상자당 2000달러로 산정했다. 일본은 개별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하는 방법을 제안했으나, 한국 정부는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처리하겠다며 최종적으로 3억 달러 무상, 2억 달러 차관을 받았다.

당시 정권이 일본 전범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거나, 미국의 압력으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기에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등 문제는 넘어가자. 그저 피해자를 내세워 받아낸 돈 중에 얼마가 피해자들에게 갔는지만 따지겠다. 1970년대에 정부는 징용 피해자 중 ‘사망자’만 ‘신고’를 받아 총 25억 원 즉, 전체 5억 달러(당시 약 2500억 원)의 1% 남짓한 금액만 지급하고 입을 씻었다. 나머지 자금은 포항제철에 1억 2000만 달러 등 경제개발에 사용됐다. 정부는 2006년에 들어서야 기존 보상이 불충분했다며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1인당 2000만 원 이하의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판결로 인정된 위자료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진상조사 위원회는 2015년 폐지되어 활동 종료되었고, 일본의 협조가 필요한 피해자 지원 방안은 외교 문제로 교착상태다.

강제노역과 체불임금, 방사능 피폭 등 산재, 귀국 후 고향에서 받은 멸시와 고통은 모두 제철소 고로의 쇳물로 녹아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제는 현 세대 정부가 우선 피해자들에게 충분히 보상하고 진상조사를 계속하면서, 일본 측에 ‘돈 문제는 우리가 먼저 해결했다. 사과하고 진상규명에 협조하라’고 요구할 때가 된 것 아닐까.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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