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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계란의 교훈 - 윤 철

윤철
윤철

학교 다닐 때 기말시험을 앞두고 친구가 노트를 빌리러 왔다. 그는 노력에 비해 성적은 별로였으며 다른 면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그저 아주 평범한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두드러짐이 없는 그가 항상 편해서 좋았다. 그런데 그는 오면서 계란 한 꾸러미를 가져왔다.

친구끼리 인사지만 무얼 주고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때였다. 그 계란 때문에 나는 그의 집이 시골인 것을 알았다. 도드라지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모습의 그 친구는 이미 내가 달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 깊고 세심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계란 한판을 가져온 것이다. 양계장을 하는데 방사한 토종닭이 낳은 초란으로 알이 작은 유정란이었다. 계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바쁘고 식욕이 없는 아침엔 찐달걀 하나에 우유 한 컵으로 아침을 대신할 정도다.

요즈음도 아내는 반찬이 허술하다 싶을 때면 내가 계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계란프라이를 하거나 뚝배기에 고봉으로 부푼 달걀찜으로 식탁을 풍성하게 만든다. 계란국,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등이 대표적 계란 간편 요리들이 우리집 주 식단이다.

그런데 라면만큼 계란과 궁합이 잘 맞는 음식도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라면 조리법이 있다. 라면을 끓일 때 계란 물을 미리 풀지 않고 다 끓인 다음, 먹기 직전에 날달걀 하나를 탁 깨어 넣고 휘휘 저어 풀어주면 국물이 틉틉하고 내 입맛에 딱 맞는 비법이다. 이래저래 우리 집 냉장고에서 지금도 떨어지는 날이 없는 일등 부식이 계란이다.

친구는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이다. 남들은 과묵하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 그는 때와 상대에 따라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을 잘못하기 때문에 입을 잘 열지 않는 편이다. 그러면 나의 달변은 말을 잘하는 몸에 밴 성품 때문일까? 아니다. 그냥 성품이다.

요즈음도 그 친구를 만나 반주로 소주 몇잔 기울이면 야물게 채운 그의 입 지퍼를 열어젖혔다. “계란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내 말 아직도 잊지 않았지?” 그 친구는 서두가 항상 자기집 양계 이야기를 필두로 주로 닭에 관한 얘기들이 주 소재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죽은 것 같지만 분명 살아있고,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음을 표 내지 않는 것이 계란’이라고 강조했다.

친구는 계란이나 계란으로 만든 음식을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을 ㅤㅎㅒㅆ기 때문에 이제는 그의 말을 잠언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반복되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계란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가끔 잊고 산다. 끓는 물 속이건 프라이팬 위에서건 때로는 산채로 입에 들어가도 반항하지 않고 한입 먹거리로 순교하는 계란을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다.

며칠 동안 품었던 달걀 속에서 티끌 같은 생명이 뛰고 있는 것을, 지구의 윤회와 같이 확실한 생(生)의 약동을 보았던 피천득 선생님의 〈생명〉이란 시가 생각난다. 21일 동안 품어주면 앙증맞은 날갯죽지가 달린 병아리로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천하에 알린다.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계란이지만 살아있는 생물이 분명하다. 반항하지 않는 조용한 생명체는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이 최고의 묘약’이라고....

/윤 철

윤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하였으며 수필전문계간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한 수필가로서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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