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남원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심수관 도예 전시관을 찾아갔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 좀 아쉬웠다. 자그마한 도자관에 들어가니 심수관의 멋진 작품들이 우리의 역사와 함께 자리하고 있어 반가웠다. 2019년 향년 92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일본까지 가는 일은 쉽지 않아 그와 인연이 깊은 남원 도예전시관을 찾았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죄스러움 때문인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심수관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가고시마로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15세손이다. 12대 심수관이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높이 2m의 큰 화병을 출품해 이름을 떨친 후부터, 후손들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2004년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후 노무현 대통령이 그 집을 방문하고 각료회담 간담회를 그 집에서 열어 더욱 유명해졌다.
나와의 첫 만남은 한일 지역교류 우정의 밤 행사였다. 그 당시 한일 양국은 지역들과 자매결연을 하여 양국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나는 전북과 결연도시 가고시마현에서 우정의 밤 행사 취재진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를 처음 보며 아직도 일본에서 심수관이라는 한국이름을 쓰고 있음에 놀랐다. 60대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지만 분명 일본인이었다. 그동안 재일동포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 쓰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우리나라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경외심이 흘렀다.
더 놀라운 것은 막사발로 보이는 그릇부터 대형 도자기까지 고가 가격표가 붙은 작품 가격이었다. 도예의 문외한이었던 젊은 방송인 눈에는 그저 놀라움뿐이었다. 그 후 그를 꼭 한 번 더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몇 년 후 일본 '도자기'취재 기회를 얻어 스텝들과 같이 가고시마로 달려갔다.
그는 마치 오래전 고향 사람처럼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고향 남원에서 붙잡혀 온 도공 후예로 그동안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당시 남원을 지척에 두고 근무하던 나로서는 호기심이 더해졌다.
400여 년간, 한국 성을 고집하며 일본에서 가업을 계승해 온 심수관 가! 예술성이 탁월했던 12대 심수관이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대형 작품을 출품해 예술성을 인정받았고, 일본 도자기를 국제적 반열에 올려놓게 되었다. 차 문화는 발달했으나 다기가 조잡했던 일본에서 당시 이렇게 양산된 도자기는 지역 재정에 엄청난 보물단지가 되었다.
심수관 선생님을 보며 일본에서 발달한 도자 문화의 근본도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오갔다. 그를 만난 모든 시간들은 내게 선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사한 연분홍 매화 그림이 그려진 조그마한 찻잔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찾아온 방송인에게 고향 사람이라 생각하며 따뜻하게 대해준 그의 마음이 오늘 남원 '심수관도예관'으로 나를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추석 성묘를 다녀왔다. 고향을 애타게 그리면서 가지 못하던 심수관의 선조와 같은,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400년이나 한국인으로 살길 바라던 그 뜨거운 자긍심, 그의 고향 남원에서만큼은 심수관과 그의 도자에 대한 혼(魂)이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태희 수필가는 전주 MBC에 근무했으며 <한국수필>에서 등단했다.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가 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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