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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금요수필]달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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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수필가​​​​​

자정을 갓 넘긴 포근한 밤, 언덕길에서 바라보는 달이 유난히 밝다. 늦여름의 잔영이 남아 있던 얼마 전만 해도 달빛에 몸을 적시면 서늘해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 밤 달은 불에 달군 듯 붉은 기운을 품고 있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에 몸을 숨겼다가 나와 나를 지긋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럴때면 한가롭게 달과 눈이 마주치며 생각 주머니가 열린다.

달을 바라보다 기억의 소실점에 이르면 그곳에는 언제나 고운 달빛을 맞으며 언덕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보인다. 머리는 양갈래로 따고 군데군데 때가 낀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녀다. 한 손에는 동냥 통, 나머지 손은 보따리를 들고 절뚝거리며 언덕을 걸어 간다. 소녀 뒤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 대여섯이 따른다.

이윽고 냇가에 이르면 소녀는 동냥 통을 내려놓는다. 달빛이 투영되어 반짝거리는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뒤따르던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소녀를 밀어 냇가에 빠뜨린다. 물에 빠진 소녀가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겁먹은 소녀는 급히 물가로 나와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소녀는 절름발이였었다. 나이는 우리들 보다 몇 살 위였지만 몸이 부실하여 넘어지면 자주 울었다. 그 소녀는 마을 외딴곳의 허름한 토담집에 동생과 함께 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 때 도시로 돈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소녀는 매일 마을로 동냥을 하러 다녔다. 나는 친구들과 그녀를 자주 놀렸다. 이사를 한 뒤 몇 년 뒤 가보니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섬유공장에 취직했다느니,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문만 전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귀몽(歸夢)에서 깨어나면 그 끝자락에서 그녀가 울며 서 있었고, 달빛에 젖은 대나무를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널찍한 이파리 매단 칡덩굴이 여린 대나무의 몸을 감고 있다. 소녀는 대나무처럼 여렸고 코흘리개 우리는 칡덩굴처럼 그녀를 감고 오르며 괴롭혔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소녀의 얼굴이 가슴에 와 박힌다. 그 아이도 이제는 지천명을 훌쩍 넘겨 눈매가 부드러워졌는지….

커다란 벽시계의 오후 시침처럼 달은 서편으로 기운다. 내 삶의 시침도 저 정도쯤 지나고 있을까? 돌아보면 언제부터였는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인간관계가 뻑뻑해진 느낌이 들곤 한다. 세월 따라 걷다 보니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아니어도 삶의 연륜이 쌓이면 나름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나 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말에는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사람에게 등돌려 멀어지는 자신들을 합리화하곤 한다. 이제 인생의 나이테가 자화상을 그릴 만큼 겹겹이 쌓여 삶의 기둥이 굵어졌는데도 삶의 깊이와 넓이는 자꾸만 작아지는 듯하다.

가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리움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때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희미해지긴 마찬가지다. 육체가 쇠잔해지면 정신도 기력을 잃어가는 걸까?

오늘따라 달을 품은 호수가 거울을 방불케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여도 ​호수와 하늘의 심연 너머로 달빛은 하얗게 빛이 나고, 별빛을 뿌리친 나무와 풀 이파리들이 덩그러니 무심하다.

 

△박경숙은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미용실에 가는 여자> 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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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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