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귀금속보석공업단지는 1976년 문을 열었다. 준공 당시 이곳의 공식명칭은 ‘이리귀금속보석수출공업단지’였다. 수출전용공단이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귀금속보석은 물론 수입하는 원석까지 철저하게 국가통제를 받았다. 그로부터 48년의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이곳은 말 그대로 흥망성쇠를 다 겪었다. 처음 이곳을 개척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 인근에서 내려운 보석 연마사들이었다. 국내에서 보석의 원석을 다룰 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곳에 공장을 차린 연마사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중에 1980년대 들어서면서 큐빅 지르코니아라는 합성석 연마기술이 대히트를 쳤다. 이곳은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큐빅을 수출하는 곳이 되었고 한때는 1만여명에 가까운 근로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자라자 전라도는 물론이고 충청 지역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중학교를 갓 졸업했으나 가난해서 진학을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야간학교를 약속하고 데려다 일을 시켰다. 80년대 중반 이리 보석산단은 늘 사람이 넘치고 돈이 흘러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나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91년 정부가 보석수입을 전면 자유화하면서 이곳은 속절없이 쇠퇴해갔다. 많은 업체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기술이 뛰어난 연마사들과 세공사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2020년을 전후로 이 공간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약촌오거리에 호텔과 비즈니스센터가 들어서면서 거리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보석단지 내 몇몇 눈 밝은 업체들이 도로방향으로 매장을 열었다. 민간에서 시작된 이 작은 변화는 보석단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익산의 보석산업이 망가졌다 해도 몇 십년 이곳에서 보석을 깎고 귀금속을 세팅했던 장인들은 남아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보석기업들도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40여년전 이곳에서 야간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익한 까까머리 소년들이 아직도 그 시절을 기억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2021년 법정 문화도시를 준비하던 익산시와 익산문화도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문화도시는 문화를 통한 도시의 혁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5년간의 지원사업을 통해 도시문화가 지역경제와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추구했다. 익산문화도시는 제조업으로 구분되던 보석산업을 문화산업으로 바꾸는 것을 익산문화도시의 특성화 전략으로 제시했다. 지난 48년 동안 이곳은 한국 보석산업사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원석을 직접 수입해서 연마하고 귀금속으로 세공하는 전 과정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곳이다.
이곳에서 작년에 처음 열린 보물찾기축제는 이러한 변화를 시민들과 공유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한 축제였다. 그리고 올해 보석업체와 장인들은 이곳을 보석문화거리로 부르기로 하고 선포식을 열었다. 국가산업단지가 보석문화거리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아직은 이름이 바뀐 것에 불과하지만 자꾸 그 이름으로 부르면서 변화는 더 빨라질 것이다.
보석문화거리는 기존의 소규모 공장들을 공방형태로 전환시켜 장인들을 육성하고, 보석과 귀금속 매장을 열어 시민들의 보석체험과 판매가 이루어지며, 귀금속 관련 학과를 졸업한 청년들이 다양한 디자인을 실험하고 경쟁하며 성장하는 장소를 꿈꾸고 있다. 장인들과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를 만들고, 이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수시로 아트페어를 열어 청년장인들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폐쇄되어 수십년간 방치된 폐공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장들이 공방으로 바뀌고 근로자가 장인으로 바뀌는 역사가 이곳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원도연 (원광대 게임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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