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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칼럼] 프랑크푸르트 想念

20년만의 폭설이 내리는 지난 7일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폭설로 인해 꼬박 30시간을 기다린 후 대기자 명단에 등록하여 겨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일행 중 한명이 일정을 다음달로 연기하고 돌아가자고 했지만 독일에서의 일정은 그렇게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항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계약서와 투자의향서 내용을 검토하며 기다려야만 했다.지금 나는 프랑크푸르트 호텔에 짐을 풀고 이 글을 쓰고 있다.낙후와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전라북도를 위한 새천년의 전북발전과 희망의 화두는 감히 '군산자유무역지역'의 활성화와 외국기업 유치라고 말하고 싶다.지난 10월에 대통령께서 군산자유무역지역 기공식전 식사장소에서 "군산자유무역지역은 새천년 전라북도에게 최대의 선물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우리 전북도민과 기업인들의 얼굴에서 실로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볼수 있었다.38만여평에 조성되는 군산자유무역지역은 2003년부터 입주가 시작되며 제조, 물류, 무역등으로 특화된 21세기 동북아지역의 국제 무역전진기지로 육성될 예정이다.3년 후에는 인근의 군산항을 자유무역지역으로 편입시켜 물류기능을 보강하고, 익산자유무역지역의 기능을 고도화시킨 후 전주과학산업단지와 연계하면 그야말로 군산-전주-익산을 연결하는 광역자유무역지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이렇게 된다면 군산자유무역지역에는 100여개의 외국기업들이 입주하고 2만여명의 우리 근로자들의 고용 창출과 7천억원의 부가가치 창출 그리고 연간 40억 달러의 수출이 이루어질 것이다.2000년 한해에 전라북도가 이룩한 약 27억 달러의 수출액에 비교한다면 군산자유무역지역의 활성화가 가져다주는 전북발전의 시너지 효과를 짐작할 수 있다.그동안 전북발전을 위한 대형 SOC사업들은 새만금과 용담댐사업이었다.하지만 새만금사업은 환경단체와 일부 주민들의 반대, 그리고 야당의 지역이기주의에 발목을 잡혀 지금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고, 용담댐은 지난해 완공되면서 담수를 시작했다.그렇기 때문에 전북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형 SOC사업의 구상도 필요하지만 정부의 긴축예산 편성 때문에 신규사업을 반영하기가 어려울 전망이다.이제 우리 전라북도는 모든 행정력과 도민들의 의사를 결집해서 군산자유무역지역의 조속한 완공과 외국기업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한편 군산자유무역지역의 SOC시설 즉 항만과 인입철도등이 2003년 준공에 맞춰 건설되도록 관계기관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더불어 많은 외국인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조성도 중요할 것이기 때문에 주거공간과 교육문화시설, 레져시설등도 함께 조성하여 군산이 국제도시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천하가 흰눈으로 덮힌 한반도를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보며 나는 각오하고 다짐한 것이 있다.이 좁은 땅덩어리 그 중에서도 전라북도의 희망과 발전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군산자유무역지역'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북한으로 진출하려는 세계의 일류기업들이 반드시 우리 전북, 군산으로 찾아오도록 이제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다.내일 아침부터 독일에서의 5박6일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면 뉘른베르그시 상공회의소와 함께 군산자유무역지역에 대한 독일기업의 유치 그리고 독일과의 합작회사 설립과 전북에 관광휴양단지 조성을 위해 투자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계약서와 투자의향서를 체결할 예정이다.그리고 풍력(風力)과 지열(地熱)에너지등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대체에너지를 우리 전북지역에 적용하기 위해 관련 시설을 방문하기로 일정이 잡혀있다.나는 지구의 반대편 독일에서 전북도민과 함께 생각하고자 한다.전북이 낙후와 소외지역이라는 오명을 벗고 동북아시대의 핵심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군산자유무역지역의 준공이며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고 외국기업유치를 위해 도민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노력할 것인가?오늘 이 글을 한국에 보내면서 나는 프랑크푸르트 한 작은 호텔 방에서 깊은 상념(想念)에 빠져있다./김연종(군산상공회의소 회장)■ 약 력52년 군산출생군산고, 건국대, 원광대 공학박사대우건설 호남지사장, 원우건설(주) 대표이사, 호원대 강사전북애향운동본부 이사군산상공회의소 회장(현), 원우건설 회장(현), 원광대학교 총동 창회 부회장(현), 군산개항 100주년 기념장학회 운영위원장(현), 군산고등학교 총동창회 이사(현), 원우아트홀 대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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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1.13 23:02

[전북칼럼] 어려울수록 꿈이있어야 산다

새해 아침 나는 인후동 성당에 갔다. 안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좋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깨끗한 화선지 한 장을 받은 것과 같다. 지난 해 그림을 망친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새해를 맞아 새롭게 받아든 하얀 화선지 위에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새로운 그림을 시작해야 한다." 꿈을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전이다.1960년 케네디는 냉전에 지친 미국 국민들을 향해 새로운 비전 -우주를 향한 뉴프론티어-를 제창했다. 우주공간을 목표로 한 미국인들의 도전은 기초과학과 응용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낳았고, 1969년 인간을 달에 착륙케 했다. 그 후 미국은 우주항공 분야에서 확실하게 세계 최고 최강 불패의 경쟁력을 누리고 있다.2001년 신사년(辛巳年) 우리의 비전은 두 가지 방향에 있다. 하나는 주식값이 꾸준히 오르는 나라를 향한 비전이다. 새해 벽두 주식값이 연 사흘째 올라 모처럼 웃음을 되찾았다. 이것이 한 순간의 반짝 상승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상승으로 이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첫째는 투명화 작업이다. 오늘 한국의 증권거래소와 코스닥 시장을 통틀어 주식의 시가총액은 250조원, 약 2,000억 달러이다. 반면, 일본의 일개 통신회사인 NTT의 시가총액은 650조원, 5,000억 달러를 상회한다. 아무리 대한민국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일본의 일개 통신회사 주식의 40%에 불과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핵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돈을 가진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과 한국기업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데 있다. 그들을 믿게 하는 것- 그것이 투명화 작업이고, 다른 말로 바꾸면 구조조정 작업이다. 구조조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뚫고 나가야만 우리 앞에 다시 꿈과 희망을 세울 수 있다.둘째는 디지털 경제강국의 건설이다. 지난 연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誌는 "Korea gets wired"(거미줄처럼 네트워킹되고 있는 한국)이라는 제목과 함께 한국의 인터넷 열풍을 표지 특집기사로 다뤘다. 불과 3년만에 일본을 따라잡고 미국을 제외한 여타 산업국가 가운데 정보화의 인프라(하부구조)와 인터넷 부문에서 선두그룹으로 떠오른 한국을 주목하라는 이 기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시작이지만, 디지털과 인터넷에 우리의 사활이 달려있다. 정치와 관료가 정보화의 물길을 앞장서 선도해 내기만 하면, 인터넷의 물결은 우리를 정보화 강국의 자리로 인도해줄 것이다.불과 7-8년만에 세계 최고의 정보화 경쟁력을 건설한 핀란드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1990년대초 핀란드는 한국과 비슷했다. 그러나 한국의 낡은 정치 리더십과 관료들이 고철덩어리로 변한 한보철강에 5조원을 쏟아 붓고 물류해소에 아무 구실도 못할 경부고속철도에 20조원을 투하하고 있을 때 핀란드는 국가 투명화와 정보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는 세계 최고의 나라와 IMF 구제금융 국가라는 극명한 대비로 나타났다. 같은 이치로 전라북도도 "산업화에서는 뒤졌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가야" 한다. 공해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인 디지털산업과 관광산업에서 앞서가는 데 21세기 전라북도의 꿈과 비전이 있다.또 하나의 비전은 북방 프론티어이다. 평화의 깃발로 북방을 뚫고 가야 희망이 열린다. 역사의 대문이 열렸을 때 망설이지 말고 확실하게 뛰어 들어가야 한다. 냉전의식의 감옥에서 탈출해 탈냉전의 세계사에 합류해야만 한다. 평화가 긴장보다 싸다. 2001년 국가예산 100조, 국방예산 15조(15%). 70년대와 80년대 거의 30%를 차지했던 국방비의 비중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줄어든 만큼의 예산을 정보통신 등 다른 부문에 분산시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있다.이제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서독이 동독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북한에 시장을 만들어 줘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은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과거의 중국이나 베트남이 아니다.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돈이 들어가야 시장이 생기고 북한이 뒤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속도조절론은 착각이다. 오히려 때를 놓치지 않고 변화를 끈질기게 추구해야 한다. 특히 남북간 체제 대결은 이미 끝났다. 더 이상 남북의 격차를 벌이는 일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남북의 격차를 줄여가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평화를 보장한다. 북방 비전의 실현없이 7,000만 민족의 내일은 열리지 않는다.주식값이 꾸준히 오르는 나라를 만드는 것, 디지털 정보강국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냉전을 허물고 북방으로 가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꿈이자 비전이다. /정동영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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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01.05 23:02

[전북칼럼] 세계화 구호와 모국어 경시풍조

문민정부(文民政府)가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에 등장한 구호가 '세계화'였다. 정부당국과 언론 매체를 비롯하여 지식인집단 사이에서 그것이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이 국제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국제교류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인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는 영어를 습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세계에 유통되는 지식정보 자료의 80% 정도가 영어로 되어 있고 지구촌 주민의 4분의 1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영어를 국어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가 75개국에 이르고 있는 현실도 국제화 시대의 영어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영어구사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제화 시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성급하게 강조할 때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회에 불어닥친 영어 교육 열풍이 그것이다. 교육당국이 어린 학생의 유학을 금지시킬 정도로 그 부작용이 심각했고, 자녀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전주를 비롯한 상당수의 도시에 위치한 이름 있는 유치원에서는 한 두 명의 영어권 원주민을 초빙하여 강사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찍부터 영어를 습득케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데, 그것이 세계화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어에 관한 기초적인 소양을 갖추지도 않은 미래의 새싹들에게 외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은 그들의 민족적 자아를 부정하거나 흔들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이 모국어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말했듯이 "언어는 정신의 지문"에 해당한다.새 천년 이전의 1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근대화가 대부분 서구화를 뜻했고 그것은 민족적 자아를 버리고 고유한 생활문화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서구 닮아가기'와 '서구 따라잡기' 식의 무분별한 모방과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금 우리 사회에 조성된 영어 조기교육 풍조가 20세기 초와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국제화 시대가 가속화되고 전통적인 의미의 국경개념이 무너져버린다 해도 여전히 정해진 국토에서 각각의 민족이 그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시장의 가치관이 스며든 '세계화 구호'는 상당히 위험하다. 자칫하면 그것은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구분을 없애버리면서 지구촌 한가족의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고, 나아가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민족단위의 존재근거를 위협할 수도 있다.특히 우려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세계화가 효용성과 기능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풍조로 변질된 점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 세대의 언어생활 현장에 그 징후의 일단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폐단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의 어린 세대에게 영어를 주입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에 부응하는 길인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세계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와 복합적인 문화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것이 세계화를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세계화를 실현하고 국제화 시대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국어문장 하나 작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한 것이 대학사회의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습득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생겨난 모국어 경시풍조가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왜곡된 세계화의 진행이 빚어낸 부정적 결과이다. 모국어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도 익히지 못한 젊은 세대가 냉혹한 국제경쟁의 시대를 헤쳐나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최명희가 지적했듯이,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다. 첨단 기술문명이 펼쳐놓은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그 씨앗이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버릴 것을 우려하여 최명희는 자신의 생명을 녹여 '혼불'을 썼다. 세계화의 잘못된 풍조에 감염된 젊은 세대 사이에서 수천년 동안 우리민족의 삶이 면면히 녹아 있는 모국어가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전정구(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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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2.29 23:02

[전북칼럼] '사슴사냥'의 교훈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사슴을 잡기 위해 사냥을 시작한다. 사슴이 있을 법한 산을 둘러싸고 사슴을 몰아 조금씩 올라가면서 정상에서 잡기로 약속한다. 사슴을 잡으면 모든 사냥꾼들이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사슴사냥이 무르익을 즈음 한 사냥꾼의 옆으로 토끼가 지나간다. 순간, 사냥꾼은 망설인다. 그 사냥꾼은 토끼를 잡아 배불리 먹을 수도 있지만, 그가 토끼를 잡으려는 사이에 사슴은 그의 자리가 빈 틈을 이용해 달아날 수도 있다. 사냥꾼은 생각한다. 다른 사냥꾼도 토끼를 보면 사슴사냥의 대열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다. 결국 그 사냥꾼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토끼를 잡기 위해 정상에서 사슴을 잡자는 약속을 배반하게 되고, 사슴사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루소는 '사슴사냥 우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무정부적인 특성 때문에 결국 국제사회에서 협력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냥꾼들이 사슴만을 잡도록 통제할 수 있는 중앙 권위체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사회에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슴사냥, 즉 국제협력은 도무지 어렵다는 것이다.국제사회와 달리 개별 국가는 '강제력'을 가진 중앙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루소의 사슴사냥 우화가 적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양화분권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한 국가의 중앙권력이 완벽한 통제를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위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집단, 그리고 개별 구성원을 강제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속한 집단 혹은 계층의 희생이 요구된다고 느껴질 때는 더욱 그렇다.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은 사냥꾼들에게 사슴을 잡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냥꾼들이 사슴을 잡는데 협력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사슴고기가 모든 사냥꾼에게 골고루 나누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조건이다.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에 쏠려있다. 다가오는 2001년, 우리가 잡아야 할 사슴은 자연스럽게 '경제 살리기'에 맞추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순조로와 보이지 않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경제 회생에 대한 여전한 불안감,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부정부패 사건들, 빈부격차의 심화에서 느껴야 하는 상대적 박탈감, 불안과 불신이 좀처럼 가셔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국민이 경제를 살리기 위한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믿음도, 국민 모두의 이익을 위해 공평하게 감수해야할 어려움이라는 인식도 많이 부족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경제 살리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당면과제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어느 한 집단의 혹은 특정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공통의 이익이라는 믿음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득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도록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는 일이다. '토끼를 잡기 위한 배반'보다 '사슴을 잡기 위한 협력'을 선택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새천년의 설레임으로 시작했던 한해가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사슴사냥'의 지혜를 모아 경제회생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슬기롭게 대처해 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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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2.22 23:02

[전북칼럼] 언론보도와 은행

일부 언론에서는 수시로 각 은행의 수신고와 그 추세를 비교하여 지상에 발표하고 있다. 수신고 중심으로 보도하게 되면 기자가 보도자료를 만들기도 쉽고, 또한 독자가 이해하기도 쉽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는 결과적으로 수신고가 건전성, 신인도, 경쟁력 등 은행평가를 위한 중요한 지표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언론이 수신고를 손쉬운 은행 평가자료로서 보도하는 것이라면 이는 언론이 은행영업을 잘 모르는 단순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은행산업과 경제에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먼저 수신고 증가의 경우를 보면 우량은행의 수신고만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예금보장한도제도 시행을 앞두고 출시된 자유만기예금은 유동성이 높은 자금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상품이다. 예금자가 일단 고금리로 예금한 후 나중에 불안해지면 조기해약에 따른 이자손실이 거의 없이 해약할 수 있기 때문에 거액 예금자들이 비우량은행에도 위험부담 없이 예금할 수 있는 상품이다. 이러한 예금은 위기시 제일 먼저 빠져나갈 자금이므로 은행이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차원에서는 실질적 도움이 안되겠지만 예금계수를 높여 언론보도시 대외 이미지를 좋게 하는 효과는 일반 예금과 다를 바 없다. 비우량은행의 수신고가 증가하는 또 하나의 경우로는, 부실이 커지더라도 향후 공적자금을 받아 클린뱅크화 될 것이 확실시되는 비우량은행은 이율이나 그 외의 조건만 좋다면 현재의 부실상태에도 불구하고 예금을 유치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런 은행은 고금리로 인하여 적자가 커지더라도 차후에 공적자금으로 손실을 메울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높은 금리로도 예금을 유치할 수가 있으며, 이 점에서는 공적자금을 받지 않는 우량은행보다 유리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비우량은행도 예금계수를 우량은행과 같이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신고 증가는 허수인 측면이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수신고가 감소하거나 정체된 것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에는, 이유에 상관없이 불리해진다. 구체적으로는, 영업정책상 예금고를 무리해서 늘리지 않는 은행의 경우 현재 이익이 정상적으로 나고 있을 지라도 언론보도로 인하여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 비우량은행의 경우에는 수신고가 어쩌다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여 이것이 보도되면 신인도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언론보도는 다수의 은행들로 하여금 예금계수를 무조건 늘리도록 압력을 행사하는데, 이에 따른 부작용이 은행산업과 경제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작용 중 첫째는 적정 운용규모를 초과하여 예금을 받음으로써 마진이 감소한다는 사실이다. 즉, 적정수준을 초과한 예금은 MMF나 CD 등 예금이자보다도 낮은 금리로 운용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과다한 예금보유로 인하여 고민하는 건실한 은행 중에는 더 높은 예금금리를 주는 비우량은행에 예금을 하여 수신영업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모면해보려는 은행도 나타났다. 은행산업의 과다수신규모를 반증하는 또 다른 증거로는 수신액은 감소했지만 반대로 업무이익은 증가하는 은행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신고가 줄면 대출액도 줄어 이것이 업무이익 감소로 이어지던 IMF관리체제 이전시대의 현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두 번째 부작용으로는 예금유치에 지나치게 노력한 결과로 나타나는 대출부분의 상대적 위축이다. 리스크가 없는 담보대출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담보는 없지만 리스크가 적은 신규 대출고객을 개발하면 마진이 높은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수신증가에 노력을 집중하다보니 이러한 알짜 대출부문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관리된다.결론적으로 현재 다수의 은행들은 언론의 단순한 수신고 보도로 인하여 과다한 규모의 예금을 고금리로 유지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은행들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예금을 유치하나 그럴수록 손실이 커지는 상황에 처해져 있다. 이렇게 열심히 잘못하고 있는 은행대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은행들의 노력은 시장에서 영업력이 떨어지는 은행으로 오해받을 가능성으로 인하여 평판리스크를 증가시킨다. 따라서 결자해지라는 용어가 의미하듯이 과다수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언론 편에서 먼저 수신고 보도를 중단하는 것이 문제해결 방안으로서 정석이 된다. 이러한 결단은 또한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수신고 증강의 노예가 되어 오합지졸이 된 은행원들의 생산성을 제고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혈세부담도 줄여주기 때문이다. 문제가 방치되어 적자가 커지면 결국은 국민들이 혈세로써 은행부실을 부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전북은행 김동식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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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2.15 23:02

[전북칼럼] 조화와 부조화

전주 시내의 도심이나 변두리 지역에 웬지 어색한 상업용 건물들이 심심치 않게 들어서는 것에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건물 자체보다도 주변 환경과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는 점과 전주시의 일상적 도시 이미지를 흐트러뜨린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한편 그러한 건축물이 가능하게 한 우리의 건축법이 너무 유약하기까지 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독일같은 경우 집의 지붕 형태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있고 창문을 보수할 때도 그 지역의 전체 경관을 거스르지 않나에 대하여 고심하기 때문에 이웃집의 동의를 받아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 하물며 건물 전체 형태야 말할 것이 없다. 지난 11월에 서울 코엑스 아셈 회의장과 인디언 홀에서 열흘간이나 열린 새천년건설환경디자인 세계대회가 성황리에 이루어진 것은 21세기의 우리나라 주거환경을 발전시키는 큰 촉진제가 될 것 을 기대하게 하였다. 이 대회에는 각국의 유수한 학자들을 초빙하고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의 학부 및 대학원생들을 대회에 참여토록 유도하므로써 수준높은 학술대회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우리 전주지역에서도 여러 학생들이 참가하여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좋아하였다. 이 대회의 구성은 크게 유니버설 디자인, 그린디자인, 문화디자인의 세 주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유니버설디자인이란 말 그대로 보편적 디자인을 의미한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건 없건, 젊은이건 노약자건 누구에게나 가장 편안하고 유용한 공간 환경 디자인을 의미한다. 그린디자인은 생태적 환경디자인으로 사람들이 지어내는 인공환경과 자연환경과의 가장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이 유지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환경을 지향하는 것이다. 문화디자인은 그 민족과 지역의 전통적 정서에 부합되면서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 환경디자인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주거환경은 이제 나 개인에 한정하지 않고 공동체 환경으로 구성된다는 점이 후기 산업사회의 주요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세가지 측면의 조화로운 공간디자인이야말로 중요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조화로운 집이나 건물은 한마디로 세련된 풍모를 주면서도 주변과 어울려 눈에 두드러지지 않고 편안하고 지속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다.집을 자신의 몸과 비교하면 재미있다. 우리는 모델하우스에 가서 그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에 기분좋은 느낌을 받는다. 새로운 아파트에 입주하여 그러한 모습으로 생활하고픈 마음은 누구나 같다. 몸에 잘 맞고 편안한 옷을 입을 때는 마음도 편안하지만 매우 격식적이거나 화려한 옷을 입을 때는 불편하다. 과식을 하면 살이 찌거나 위가 약한 사람은 체하기를 자주 하고 결국 질병으로 이어진다. 탐식과 별식, 그리고 미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풍기는 느낌도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가끔은 경험하게 된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의 크기에 비하여 너무 가구나 물품이 많다든지 또는 요란한 실내 마감이나 재료를 쓴다든지, 또는 화려한 실내장식용 가구나 장식품이 많은 경우는 공간감이 상실되어 그러한 물건들로 하여금 오히려 거주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게 될 것이다. 가장 조화로운 집은 거주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편안하며 정신적으로 충분히 휴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을 꾸미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물질환경에 현혹되지 말되 가족의 건강한 주생활을 위해 필요한 곳은 과감하게 개선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나라도 이제 집의 리모델링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공간 환경을 적은 비용으로 늘 새롭게 개선할 수 있는 지혜와 정보를 받아들이도록 거주자나 건물 소유주의 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것 역시 조화로움에 대한 의식과 태도로써 21세기에 가서는 더욱 중요하게 요구될 거주 의식이다. 실내공간의 조화는 내 가족을 위한 것이고 실외 공간이나 외관의 조화는 이웃과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무엇보다도 본인들에게 큰 정신적 기쁨을 안겨주고 거주자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 그리고 이웃 주민들과 조화의 중요성을 인지하도록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박선희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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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2.08 23:02

[전북칼럼] 신춘문예와 예비문인

문인이 되려는 사람마다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겨울이 다가오면 마음이 조급해 지고 기대감이 부풀면서 지난 세월의 습작품 모두를 갈기갈기 찢으며 온밤을 밝히는 퇴고의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의 결실이 바로 당선의 영광인데, 중요한 것은 문학적 글쓰기가 그의 삶에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지속시켜나갈 가치 있는 생의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인간과 예술 앞에 가로놓인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고통을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에서 등단의 영광 그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응모하는 예비문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의아스럽다. 당선을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는 통과제의의 절차 정도로 간주하는 태도가 팽배해 있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사르뜨르는 구토에서 예술가가 겪고 있는 고통과 갈등과 절망을 너무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는바, 문학의 길은 고통스런 투쟁이며 그칠 줄 모르는 갈등이 연속되는 가시밭길에 비유될 수 있다. 그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의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문학예술 본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외로운 구도자의 의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새로운 예술정신에 장애가 되는 기성문학의 사고를 거부하는 반항정신이나,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어 인간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신비스런 그 모든 현상들과 맞서서 대결하려는 고통스런 의지와 집념의 자세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모험과 혁신을 외면하는 상식적인 글쓰기가 팽배하면 진정한 예술의 빛이 꺼져버린다. 좋은 작품이란 시류의 거부로부터 탄생될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황당하게 늘어놓아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만드는 난삽한 잡설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소재에서 문학적 메시지의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현 문단의 유행병이 신인들의 작품에 그대로 추수되는 현상이 문제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기성 문단에서 이해 받지 못하는 실험성과 통상적인 문학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참신성, 그리고 나아가 나태한 우리 문단을 쇄신할 수 있는 혁신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신인의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의 헛된 소망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것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매년 반복되는 상식적인 글쓰기의 범용성이 만들어 내는 문학의 소품화(小品化) 현상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춘문예 제도는 평균적 글쓰기의 능력을 선별하는 제도가 아니다. 기성 문단의 모든 관행에 굴복하고 작금의 문단 기류에 영합하는 문학적 글쓰기를 공인하는 제도로 전락한다면 그것의 존재가치나 의의는 반감되거나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적 삶의 법칙에 매몰되는 기성 문단의 부정적 흐름을 과감히 떨쳐버리는 패기의 정신이 신인들에게 요구되는데, 그러한 정신은 평균적 글쓰기의 상식을 깨뜨리면서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정신과 상통한다. 위대한 예술에서 그것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살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해 왔다. 일상의 삶에 고귀한 예술정신을 주입하는 방법이나, 현대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영원히 살아있는 예술정신의 구현에 목적을 두지 않고 기교와 수사의 세련미만을 추구하는 신인들의 글쓰기는 그들의 작품에서 진한 감동을 스스로 추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깊이 있게 추구한 작품, 미래의 비전을 탐색하면서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작품, 왜소화된 정신문명과 황폐한 현대적 삶의 고뇌를 천착한 작품을 찾기 어려운 것이 최근의 신춘문예 응모자들의 작품에 나타난 한계이다. 올해의 선별작업에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작품이 당선의 영예를 안기를 희망하면서 마지막으로 심사에 참여하는 문인들과 제도 시행의 주체인 신문사 관련 당사자들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심사료를 챙기는 연례행사의 일환으로 착각하여 온 생애를 문학에 바칠 각오로 젊음을 불태운 신인들의 원고뭉치를 가벼운 손짓으로 날려버림으로써, 진짜 당선작이 소외되는 사례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심사자들의 심사과정도 문제이지만, 특히 그들의 선정작업에 따른 부조리한 관행과 모순 때문에 신춘문예 등단의 영광을 안아야 할 예비문인들이 패배와 절망을 맛보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직도 외국문학 전공 교수가 동원되는 현실, 상아탑에 안주하며 기득권을 누리는 기성 문인들의 보수적 성향, 중앙문단의 이름 있는 작가들이 해갈이 하듯이 교대로 심사하는 모순, 지방문인들이 소외되고 지역문학의 특색이 무시되는 현상 등이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되어야 한다. 미래의 한국문학을 건설할 전사들을 선발하는 신춘문예 등단제도의 투명성과 공정성은 이 모든 모순과 부조리한 관행들이 타파될 때 가능하다./전정구(전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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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2.01 23:02

[전북칼럼] 느림의 미덕

어느 순간 '속도'는 이 시대의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버렸다. 속도, 그 중에서도 '빠름'만을 신봉하는 현대사회는 '1초라도 빨리'를 외쳐대며 사람들을 몰아간다. 현기증 나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 게으른 사람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 시대의 유일한 미덕은 '빠름'이며, 따라서 '느림'은 곧 악덕이다. 비록 한국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인의 빠름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것,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듯 빠른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모습, 앞지르고 끼어들고 차선을 바꾸지 못해 안달하는 운전자들, 5초를 기다리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엘리베이터 안의 풍경...'빠름'의 가치에 지배당하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빨리빨리'는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한국이 지난 수십년 간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짓눌러온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남보다 빨리 가야하고, 행여 머뭇거리다 남보다 늦어지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기묘한 압박감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어쨌든, 빠름에 대한 한국인의 신앙은 결국 빠른 성장을 이룩했으며, 빨리 성장하고 싶은 나라들의 모범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우리는 빠른 성장에 우쭐해 했으며, '빠름'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빠름의 가치만을 신봉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생각과 생활에서 '느림'을 몰아내면서 무엇을 잃었을까? 조기완공을 자축하던 건물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역사에 남을만한 '빠른성장'은 그것이 과연 '성장'이었는가를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뒤돌아보며 생각해보는 여유를 잃고 있다. 느림의 미덕을 잃고 있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느림은 게으름도 무능력도 아니다. 시간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느림은 그저 '조롱'받아야 할 악덕이 아니라 일상이 뒤죽박죽 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이며 능력이다.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능력, 서두르는 사람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비록 느리더라도 차분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후회하지 않을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느림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느림, 느긋함 그리고 여유가 무조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속한 처방이 요구되는 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처럼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해야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빨리 해야할 것과 천천히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빨리빨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의 앞엔 빨리 풀어야 할 과제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빨리 풀지 않으면 위기가 올 것이라는 우려가 우리의 조바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빨리빨리'에만 집착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똑같은 문제에 다시 부닥쳐야 할 지도 모른다.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중요한 문제라면, 오히려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서두르면 안된다. 빠름보다는 오히려 느림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조급함을 누르고,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서 차분하게 풀어나가려는 마음가짐, 그것이 우리가 회복해야할 '느림의 미덕'이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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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1.24 23:02

[전북칼럼] 신뢰부국(信賴富國)

국내에서 많이 듣는 단어가 경제선진화, 경영선진화 등 선진화다. 선진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지만 문제는 선진화 가능성이다. 선진화에 필수불가결한 자원들 중 유형의 자원에만 마음을 빼앗겨 간과하고 있는 자원은 없는지? 동일한 유형자원을 가진 경제라도 이들 자원이 결합될 수 있는 범위와 방식에 따라 생산능력에서 큰 차이가 나며 선진과 후진의 차이가 드러난다. 결합을 쉽고 강하게 하는 자원 중 형태는 없지만 중요한 것이 계약의 기반이 되는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결합자체가 어려워지고, 특히 약속이 장기간에 걸쳐 이행되어야 하거나 배신할 경우에 큰 손실이 따르는 결합은 비록 약속이행에 따른 이익이 커도 이에 따른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회피하게 된다.신뢰가 부족할 경우에 치르는 손실은 일부 국내기업들이 자금 조달할 때 잘 나타난다. 회계처리가 불투명하여 실제의 부채액과 현금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운 기업은 저금리의 장기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조달을 할 수 없고 대신에 단기의 고금리 차입을 통해 투자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진다.인사관리에 있어서도 원칙보다 파벌이익을 선호하여 인사관리에 대한 조직원들의 신뢰가 줄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우수한 직원들이 이탈한다. 인사관리에 대한 신뢰도가 낮기 때문에 기업합병에 따른 시너지효과도 작다. 인사정책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타민족에 비해 높은 앵글로색슨계통의 기업문화권에서는 합병이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시너지효과도 나타나는 반면, 국내에서는 합병에 따른 인원조정의 규모가 크지 않아도 자신들에 관한 인사결정이 합병 후에도 공정하게 처리되리라는 믿음이 없어 합병자체에 강한 저항이 따른다. 서로를 믿기 어려워 합병 후에도 한 지붕아래 두 살림을 하는 기업이 나타날 수도 있다.국가의 정책입안자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경우에는 국가경제 전체가 이로 인한 손실을 입게된다. 한번 결정된 정책이 그때 그때마다의 이익집단의 힘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정책결정의 확고성(finality)이 낮은 경우에는 경제에 드리운 불확실성이 짙게 되어 투자를 위한 장기전망이 불가능하게 되어 장기사업계획이 유보되고 자금시장의 투자자들이 관망세를 지속하게 되어 주가가 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국내적으로 보면 현정부는 그 동안 여러 차례 경제개혁에 관한 정책을 발표하였지만 이에 따른 해외 반응은 기대 이하였고 주가에 미친 영향도 미미했다. 해외투자자들이 현 정부의 경제개혁을 향한 의지에 대하여 크게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치분야에 있어서는 민주주의와 남북화합을 위한 현정부의 소신과 정책결정의 확고성에 대하여 신뢰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결정의 발표는 즉각적으로 주변국들의 대북정책에 변화를 유발시키는 힘이 있다. 이렇게 동일한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그 동안 해당분야에서 쌓은 신뢰의 정도에 따라 해외에서의 반응이 다르고 효과도 달라지는 것이다.신뢰란 이렇게 서로의 이익을 증대시키며 결합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는 중요한 자원이지만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우수한 문화가 뒷받침될 때 신뢰부국(信賴富國)이 될 수 있다. 신뢰수준이 교육수준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관찰된 바로는 종교의 영향이 더 크다. 이제까지의 신뢰부국은 서구 중에서도 신교도의 비중이 높은 국가들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이룩된 새로운 신교전통은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개인과 조직을 배출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의 경우 우리 인격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유교는 불행히도 명분과 체면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하여 신뢰부국을 이룩하는데 실패했다. 국내 기독교 역시 교인 숫자는 늘었지만 사회 저변에 깔린 형식주의와 기복신앙으로 인하여 신뢰 면에서는 더 기여한 바가 없다.결론적으로 한국은 현재 신뢰부국이 아니며 가까운 장래에 신뢰부국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문화적 받침대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40년전 4.19내각과 5.16정권이 경제적 빈국임을 통감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듯이 지금이라도 우리 지도층이 신뢰빈국임을 통감하고 이를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국민이라면 이미 신뢰부국을 이룰 수 있는 씨앗을 내면에 가졌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개혁신앙에 따라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3백80년전 추운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에게도 이러한 씨앗이 있었다./김동식(전북은행 리스크관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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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1.17 23:02

[전북칼럼] 복지행정의 사례

1993년 여름 우리 부부는 1년간의 해외 연구를 목적으로 도쿄의 나리타공항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외국인 거주 신고를 하기 위해 우리가 찾아간 곳은 미나토구 구청이었다. 그런데 우선 눈에 띈 것은 직원의 친절하고 신속한 일처리 태도였다. 그리고 담당 부서별로 다양한 책자와 홍보물이 잘 비치되어 있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가져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더욱이 놀라운 것은 외국인은 물론 다른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만들어진 '미나토구 생활가이드'라는 책자가 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제작된 것이었다. 알찬 살림을 위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자 속에는 그야말로 온갖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다. 여가정보, 문화정보, 생활정보, 행정정보 등 네가지 주제로 구분이 수록된 이 책 속의 몇가지 정보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여가정보'에는 공공시설 정보가 안내돼 있었다. 복지회관이나 아동관, 사회교육시설 등의 집회시설, 테니스 및 수영 등의 각종 스포츠시설, 도서관, 박물관이나 미술관, 식물원 등과 구내 및 도내의 유적지등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담겨져 있다.'문화정보'에는 식생활 문화로 대표적인 식당 음식에 대한 소개, 관혼상제에 대한 풍습, 일상적 생활에서의 예절이나 금기사항, 여행을 위한 교통안내 및 숙박의 상식, 그리고 국제교류 기관에 대한 소개가 들어 있다.'생활정보'에는 우선 외국인을 배려한 수입식품 취급점과 백화점 사용안내, 소비자센터, 공예품안내, 이발소와 미장원, 목욕탕과 코인세탁실(빨래방) 소개, 주택 거주에 대한 자세한 임대비 소개, 이사문제, 쓰레기 처리방법, 금융기관, 해외통신 및 우편, 교통안내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행정정보'에는 구청 청사의 주요 창구 안내 및 등록과 신고절차, 인감등록, 외국인 상담, 세금제도와 연금제도, 고령자복지 및 심신장애자 지원과 시설안내, 비상시 연락번호, 지진 대비 상황 및 대응, 건강보험, 어린이 출산 및 양육과 교육기관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주된 내용과 더불어 마지막 장에는 각 기관에 대한 전화번호 안내 및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간단한 회화안내가 마련이 되어 있어 일어가 능숙치 못한 외국인들을 위한 배려에 많은 관심을 가진, 노력하는 복지 행정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필자가 이것을 장황하게 소개한 이유는 우리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에서도 외국인들의 증가에 따른 선진 복지행정 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이다. 다른 것도 아닌 위와 같은 정보책자야말로 소중한 생활지침서로서 복지 행정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전북대학교만 하더라도 국제교류에 따른 정책으로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권의 방문 유학생 및 언어 교육을 위한 서구권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학교 뿐만 아니라 영어학원을 비롯한 몇몇 회화교육을 위한 각종 기관에는 해당 외국인 강사가 늘고 있으며 또 이전부터 공단에도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단 1년 정도 체류한다 하더라도 낯설은 이곳에서의 1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그들이 체험한 이 곳에 대한 인식은 한국에 대한 전체 이미지로 동일시 될 수 있다. 선진국의 지표는 복지 행정의 수준과 밀접하다고 볼 때 우리도 이제 이런 부분에 다각도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을 위해 배려할 수 있는 태도의 수준이라면 내국인들에게는 이미 편안하고 믿을 수 있는 행정적 복지를 체득하고 있을 테니까./박선희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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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1.10 23:02

[전북칼럼] 서정주 시인과 그의 문학

서정주 시인과 그의 문학에 대한 단상 우리 세대는 미당 서정주의 시와 더불어 감동을 그물질하며 젊음의 한때를 보냈었다.그 시절 우리는 시인이 던져 주던 크고 작은 언어의 매력에 취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이끌려 감미로운 시어를 질겅질겅 씹으면 감동의 향기가 우리의 입안 가득히 번졌었다. 서정주는 그만큼 우리의 젊은 시절을 들뜨게 했던 시인이었다.그러나 우리가 미당 문학에 깊이 있게 다가서면 설수록 석연치 않은 그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의 삶이 보여주었던 영광과 오욕으로 인해 우리는 그를 비난하기도 했고 사모하기도 했었다.분명 그의 시는 우리 문학사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고 동시에찬란한 빛이 되기도 했다.식민지 말기에 쓰여진 몇 편의 친일시에 대한 것이라든지, 폭력이 난무하던 광란의 그 시절 독재자와 관련된 뜬소문이 우리를 실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건재했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빛나는 시문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애송시로 자리잡은 [菊花 옆에서]는 물론이고 수많은 그의 작품이 한국시문학사의 재보(財寶)에 속하는 것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면서 국화꽃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줄 것 같던 미당이 지금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병석에 누워 있다.아내를 잃어버리고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입원한 그가 곡기를 거부한다는 소식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스무 살 젊음의 고개에서 방황하며 뜬구름 같은 보들레르병(病)을 앓았던 서정주라는 시인이 있었기에 근대시의 아버지 보들레르의 상징주의를 한국어로 영접(迎接)할 수 있었고, 불란서 문학과 우리 시의 감동적인 조우가 가능했다."麝香薄荷의 뒤안 길이다./아름다운 배암....../을마나 크다란 음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중략)... 바늘에 꼬여 두를가보다--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크레오파투라의 피 먹은양 붉게 타오르는/고흔 입설이다-- 슴여라 배암!//우리 順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배암!"([花蛇]).'꽃다님' 보다도 아름다운 빛이 감도는 그의 언어는 아직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또 다른 그의 대표작 [自畵像]도 마찬가지이다."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싶다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自畵像]).근대 시인의 자화상을 그려낸 서정주가 한국시의 정부(政府)라는 극찬을 받은 것은 문학사에 남을 만한 수작을 썼던 것에서 연유하기도 하지만, 백제인의 후예로서 거의 유일하게 신라정신을 탐구해 왔던 점도 빠뜨릴 수 없다. {新羅抄}(1961)와 {질마재 神話}(1975)에서 그는 지배층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민중의 생활세계에 자리잡은 설화를 오늘의 그것으로 되살려 냈다.어디 그뿐이랴. 그는 우리 언어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것의 부활과 약동을 노래해 왔다.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그의 삶이었지만, 그는 민족어의 사지(死地)였던 식민지 조선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펼쳐냈던 시인이기도 했다.그 누구도 찾지 않고 아무도 목말라하지 않는 시예술를 붙잡고 평생을 매진해온 노시인 서정주가 상배(喪配)의 상실감으로 외부인과의 만남을 극력 꺼려하며 말년의 삶을 외로이 견뎌내고 있다. 우리는 그의 빛나는 예술을 배반해 왔던 그 모든 오욕의 것들을 질곡의 근대사가 강요했던 민족의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져야 할 것이다.한국어의 동산에 만개할 시혼(詩魂)을 꽃피우기 위해 세속의 영욕을 함께 해온 미당 서정주의 삶과 그의 문학을 애정 어린 눈길로 감싸안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찬란히 티워오는 詩의 이슬'을 향해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살아왔던 그의 생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전정구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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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1.03 23:02

[전북칼럼] 국회의 가을

국회엔 가을이 없다. 기승을 부리던 팔월의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으면 그때부터는 계절의 변화에 둔감해진다.왜냐하면 가을의 한 복판에 국정감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일간의 국정감사가 끝나고 나서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할 때쯤 되면 계절은 어느새 초겨울로 접어드는 것이 국회의 가을 풍경이다.국회의원에게 국정감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나라의 살림을 제대로 꾸려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고쳐야 할 것은 없는지를 조목조목 따져보아, 한해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동시에 다음해를 준비하는 것이 바로 국정감사이기 때문이다.또한 국회의원 개인에게 있어 국정감사는,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소임을 다 해왔는지, 혹시 자기 책임을 미루거나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를 평가받는 기간이기도 하다.계절의 변화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러나 국정감사가 국회의원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회의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나라의 국민들이다. 왜냐하면 국회의원은 그들을 대신해서 국정감사의 현장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 뿐, 정작 국정을 평가하고 비판해야 할 당사자는 바로 국민 개개인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이제 '불신'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무관심'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매번 투표 때마다 국민의 참여를 호소하지만 그 결과는 해마다 나빠지고 있으며, '정치', '정치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있다.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이미 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치를 외면하는 국민들에게 '국정감사'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 국민의 '관심'이다. 왜냐하면, '정치'가 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국민의 '비판'이기 때문이다.'무관심' 속에서는 따끔한 '비판'을 기대하기 어렵고, '국민을 위한' 정치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욕심'을 부려서라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정감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국민의 입장에서 직접 국정을 평가하는 동시에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임무를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를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이 '정치'에 그리고 '국정감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그러나 이러한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노력도 결국 '국민 모두의 관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정한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이다.'정치'를 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정치인'과 '국민'의 힘이 모아져야 할 때다. 가을을 잊은 국회의 모습이 국민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 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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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27 23:02

[전북칼럼] 구조조정의 중요성

근래에 게재된 국내 경제상황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위기 가능성에 대하여 엇갈린 주장들이 보인다. 국내 경제의 펀드멘털이 양호하니 경제위기는 없다는 내용이 있는 반면,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가 파탄 날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도 자주 보인다.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일까? 금융위기는 올 것인가? 대책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경제에 대한 경제연구소들의 진단은 국내경기가 경기 주기상 호황의 정점을 막 지났거나 곧 지날 것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국내 경제의 펀드멘털이 아직은 양호하기 때문에 악화된 경제상황으로 인하여 경제와 금융부문에 위기가 도래할 때는 아니다. 그렇다면 근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금융위기설과 이로 인한 경제파탄 가능성의 근거는 무엇일까?과거 개발독재시대와는 달리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의 규모가 커진 지금은 금융위기에 따른 자금흐름이 경제부문을 강타할 수 있는 위력을 갖게 되었다. 만약 미국경제가 고유가 지속 등으로 연착륙에 실패하여 갑자기 침체에 빠지게 되거나, 혹은 해외 투자자들의 눈에 국내 구조조정의 진행이 부진할 것으로 확신될 경우,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한 외국인투자자의 자금은 IMF협약체결 전의 상황같이 급속히 빠져나갈 것이다.최근의 금융위기설은 미국의 주가수익률 하락에 따른 국내 투자비중 축소나 국내의 불확실한 구조조정 전망 등 국내외 금융부문에서 발생하는 요인들에 기초를 두었으며 현실화될 수 있는 주장들이다.금융위기의 여러 요인 중에서 우리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정책변수는 구조조정이다. 국민들이 고통의 대명사와 같이 여기는 구조조정을 외국인투자자들이 중요한 투자 잣대로 삼는 이유는 이들이 긴 세월 동안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에 투자하면서 이들 정부와 기업이 금융위기와 경쟁력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실시한 구조조정의 실태와 그 결과들을 보아 왔고, 이로부터 구조조정의 중요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지금 해외투자자들에게 비쳐진 국내 구조조정의 모습은 확실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더 지켜 봐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구조조정 반대세력의 저항과 차기 선거를 앞둔 정치논리에 의해 구조조정이 형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은 국내 여러 집단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이들은 최근의 고유가, 중동사태 등 국제경제적 악재들이 발생한 후에 이것이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과 대만의 미약한 금융부문에 미칠 악영향에 더욱 유의하고 있다.외국인투자자들의 이러한 상황과 향후 하락이 예상되는 경기추세를 고려할 때 구조조정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시간을 끄는 전략은 경기 주기상 늦었고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적 위험이 크다. 금융위기가 도래하면 여당의 정권재창출에 큰 문제가 생긴다.이와 반대로 정부가 해외의 기대수준에 부합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할 경우에는 인기하락에 따른 선거패배 가능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따르게 된다. 더 나아가서 인기하락으로 선거에서 지면 구조조정의 의지가 미약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이로 인한 금융불안이 재개되어 선거 이후의 경제적 위험이 존재한다.결론적으로 정부는 구조조정이라는 사안을 놓고 국가가 부담하는 경제적 리스크와 정권이 부담하는 정치적 리스크를 어떻게 구성하는냐의 문제에 당면해 있다고 보여진다. 구조조정 여하에 따라 두 가지 리스크의 구성비와 총량이 달라진다.정부가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 구조조정을 선택한다면 여당에게는 정권을 잃는 정치적 리스크가 커 보이나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적 리스크를 많이 줄이게 됨으로써 두 가지 리스크의 총량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반대로 구조조정을 형식적으로 실시할 경우에는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적 리스크가 매우 커지고 이로 인하여 정치적 리스크 또한 커져서 리스크 총량이 늘어날 것이다.해외 사례를 보면,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내각이 구조조정에 성공하여 국가경쟁력을 되찾았고 정권유지에도 성공한 반면, 선거패배를 두려워하여 경기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며 10년을 허비한 80년대 남미의 정권들은 지키려던 정권도 잃었고 경제도 망쳤다.'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오늘날 정부가 중요정책을 선택할 때에도 유효한 것은 아닐는지?/김동식 (전북은행 리스크관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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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20 23:02

[전북칼럼] 주거환경과 청소년 발달

최근 신문지상에 핫이슈로 떠오른 러브호텔은 학교 및 주거환경 저해요소로서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이에 당국은 구체적인 법규 제정을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행법상 학교 2백미터 이내로만 제한한 유흥업소 규제는 당초부터 너무 어처구니 없는 규제였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을 주변 거주 지역에서 도보로 통학하도록 유도하는 이 시점에서 2백미터는 도보로 5분 정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영국의 환경심리학자인 리 테란스는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걸어서 통학하는 아이들보다 도시와 자연환경에 대한 인지와 이해가 훨씬 덜 발달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걷는 일은 다리를 튼튼하게 해주고 어린이들이 주변 사물을 보면서 사회 및 주변 환경의 흐름과 동향을 수용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거주 인접지역의 지리적 공간에 대한 인지적 분석을 얻을 수 있다.미국 메사츄세츠주의 한 조사 결과 가정에서 어린 자녀를 유치원에 보낼 필요가 있을 때 멀리있는 무료 시설을 기피하고 유료라도 가까운 곳으로 보내기를 원하는 부모가 5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인들이 자녀발달을 위한 주거환경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사해 준다. 이에 비해 우리 부모들은 통학차를 운행하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며, 외형적인 건물과 외형적 교육형식에 더 관심을 갖는 경우가 아직도 많은 듯하다.최근 전주시내 고등학교 2개를 선정하여 주변에 유흥업소가 많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두 지역의 학생들 행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결과는 너무도 놀라웠다. 두 학교의 학생들 행태 차이가 매우 컸으며 술집은 물론 모텔과 여관을 이용한 학생들까지도 나타났기 때문이다.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수년전부터 '살기좋은 동네만들기'를 구청 중심으로 전개하여 주민이 주도가 되어 어린자녀는 물론 청소년과 여성 및 노인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좋은 동네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자녀 발달 시기 중 가장 민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시기가 청소년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성장기를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많은 호기심과 취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육체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일에 대한 탐색에 열정적이다. 이러한 열정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환경적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됨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그러나 너무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변의 도시 환경 중 가장 외면되어 있는 것이 청소년을 위한 공간 환경이다.영유아 및 어린아동들의 경우 공동주거지역 내에 다소 부족은 하지만 심신의 발달을 위한 놀이터가 시설돼 있으며 이는 법적으로 규제돼 있다.어른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각종 스포츠 활동 등 여가활동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청소년들은 입시환경에 찌들어 심신이 쇠퇴하고 또 위축돼 있지만 학교는 물론 가정, 사회 등 어느 곳을 가든, 지친 심신을 맘껏 의지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몇 년전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 옆 전주천 고수부지에 농구대를 비롯한 몇가지 체육시설이 조성되었다.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동네 청소년들은 환호하며 당장 농구공을 사서 달려가 서로 어우러져서 농구를 즐겼다. 이런 모습은 주변을 지나는 모든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얼마 안가 농구망은 찢어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공을 던지며 즐거워 하였다. 또 한쪽에서는 '게이트볼' 코트가 조성되어 부부 노인들이 매일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올림픽 스타를 양성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을 위한 신체 단련의 공간과 시설을 어린이 놀이터처럼 주거 단지 내에 시설하도록 법제화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청소년들이 육체적 에너지를 게임방이나 끽연 내지는 본드흡입, 비도덕적인 성적 행태로 분출하는 것을 진정으로 걱정한다면, 이들을 위한 건전하고 밝은 주거환경을 조성해야 한다.우리사회가 그들에게 해 줄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도로환경을 보면 도시 환경에 대한 관계 부처의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심지를 벗어난 일반 주거 단지 도로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인도는 간데없고 차도만 있다. 자동차를 피해 어디로 걸어야 할지 난감한 지역이 한 두곳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도를 충분히 확보한 후 차도를 개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송천동에서 어린이회관으로 오르는 길 역시 차도만 4차선으로 확보되어 있고 인도 폭은 불과 30센티미터도 안된다. 봄이나 가을 소풍때 아이들의 단체 행렬을 보면 정말 불안하고 화가 치민다. 도대체 이런 행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유채꽃 축제와 같은 행사보다는 일반인과 청소년을 위한 각종 기본적인 체육시설을 전주천 고수부지 곳곳에 설치해 누구든지 산책이나 조깅을 하며 쉴 수 있는 그린환경을 함께 조성해 주는 일 등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박선희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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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13 23:02

[전북칼럼] 가을과 한 편의 시

진부한 말이지만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 다가왔다. 현란한 시각문화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마음의 등불을 밝히면서 느긋한 기분으로 한 편의 시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문명의 속도에 지친 우리에게 그것이 큰 위안을 주지 않을까 한다. 특히 감각적인 대중문화에 물들어 있는 컴퓨터 세대들에게 가을이라는 계절과 관련하여 권해주고 싶은 시 한 편이 있다. 떨어지는 낙엽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를 되짚게 해주는 정곡(鄭谷)의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시작품의 전문과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개미는 돌아갈 구멍을 찾기 어렵고(返蟻難尋穴)/새는 돌아갈 둥지를 찾기 쉽다(歸禽易見巢)/낭하(廊下)의 뜰에 가득하나 스님은 싫어하지 않고(滿廊僧不厭)/일개 속인은 많은 것을 싫어한다(一個俗嫌多).정곡은 개미와 새, 그리고 도(道)를 닦기 위해 정진하는 스님과 보통사람인 속인(俗人)을 등장시키고 있다. 문제는 왜, 어째서 이러한 소재들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개미는 어째서 돌아갈 구멍을 찾기가 어렵고, 새는 돌아갈 둥지를 찾기 쉬운가? 뜰에 가득한데도 스님은 싫어하지 않고, 왜 일개 속인은 수북히 쌓인 그것을 싫어하는가? 동시에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시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의문들을 해결해야 한다. 첫째, 개미 구멍을 찾기 어렵고 새 둥지를 발견하기 쉬운 것은 낙엽 때문이다. 낙엽이 떨어져 개미구멍을 덮으니 찾기 어렵고, 무성한 나뭇잎 가지 위에 놓여있던 둥지는 그 잎들이 떨어지니 쉽게 눈에 띈다. 시간적 배경이 가을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는 1-2구에서 시인은 낙엽이라는 단어를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낙엽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3-4구의 뜰에 가득히 쌓인 것과 속인이 싫어하는 많은 것도 낙엽임을 지시해 준다. 그 어디에서도 낙엽에 관한 말을 내비치지도 않으면서 시인은 낙엽을 함축하고 암시할 수 있도록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둘째, 낙엽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보다 중요한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낙엽을 통해 인생살이에 대한 어떤 인식과 성찰을 발견해 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3-4구에서 대비되고 있는 두 인물인 스님과 속인의 마음가짐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 사람은 낙엽에서 인생의 귀중한 교훈을 발견해 내고 있는 반면에 다른 또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낙엽으로 대표되는 자연현상을 통해 인생살이를 관조하려는 스님의 마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비유컨대 우리 인생살이도 낙엽과 마찬가지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을이 되어 자신을 길러준 나무의 그루터기로 돌아가는 것이 낙엽만은 아닐 것이다. 스님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인간도 때가 되면 자신을 길러준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발견한 까닭에 스님은 아침저녁으로 힘들게 쓸어버려야 할 낙엽을 귀찮아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속인은 그렇지 않다. 자연 앞에 서서, 그 스승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스님과 그렇지 못한 속인의 대비를 통해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와 운행 속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보고 즐기는 것보다는 읽고 느끼는 삶이 보다 진지하고 아름답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도 그것이 매우 유익하다. 느릿느릿 음미하는 독서가 그런 것이다. 빠른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진지함과 여유를 빼앗아 간다. 속도의 시대 탓인지 독서에 대한 생각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도와의 전쟁을 치르는 그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 바로 독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너무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정서에 물든 컴퓨터 세대들이 한번쯤 마음의 등불을 켜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전정구(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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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10.06 23:02

[전북칼럼] 디지털 민주주의

아무래도 컴퓨터엔 별로 자신이 없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이 시공간을 비약적으로 압축시키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 시대'에, 어쩐일인지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주눅부터 드는게 사실이다. 컴퓨터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컴퓨터 모니터보다는 텔레비전이, 키보드보다는 리모콘이, 인터넷보다는 신문이 더 익숙하다.최근, 큰마음 먹고 새집을 하나 장만했다. 문패도 반듯하게 달고, 현관도 예쁘게 꾸미고 몇 개의 방엔 나의 생각과 계획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그럴듯한 주소도 받았으니 이제 집으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춘 셈이다. 사이버 공간의 네티즌 모두에게 개방된 이 집에 손님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따뜻한 격려의 말이나 호된 질책 혹은 그들의 바람과 걱정을 잊지 않고 남겨두고 있다.텔레비전보다 컴퓨터를 먼저 켜고, 리모콘 대신 마우스를 잡은 것은 사이버 공간에 새집을 마련하고 부터이다. 어렴풋이 생각되던 전자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된 것도 아마 그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텔레데모크라시, 전자민주주의 혹은 E-폴리틱스 등의 신조어는 어느새 새로운 세기, 새로운 정치를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나날이 복잡해지는 정치구조 하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되던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참여부족이나 투명성의 미흡으로 인해 그 한계가 지적되면서 전자민주주의가 이러한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터넷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정보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전자민주주의는 그 동안의 정보독점 문제나 정책 형성 및 집행과정의 폐쇄성 문제를 보완해결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물론, 아직은 기존의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대체하는 전자민주주의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의제의 개선과 개혁을 위해 전자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충분하게 조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은 온라인 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유권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항시적인 접촉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국민의 요구에 더 충성스럽게, 더 빨리 응답하도록 하고 있으며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부의 입장에서도 국민에게 정부가 가진 정보를 전자적으로 신속정확하게 공개함으로써 투명한 정부를 실현할 수 있고, 원거리에 흩어져있는 일반 시민들이 디지털화한 통신매체를 이용해 정부와 대화하고 공적 토론에 참가하며 직접 공공정책 결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정부의 신뢰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전자민주주의의 미래 역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그 한편으로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소득의 차이를 만들어 정보이용능력이 없는 디지털 빈곤계층을 양산함으로써 소위 '정보양극화 사회'를 출현시키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 익명성과 개방성을 원칙으로 하는 인터넷상에서 거친 욕설과 인신공격, 근거 없는 비방이나 여론조작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민주주의의 미래를 그저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이버 공간의 비민주성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전자민주주의의 밝은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쌍방향성'은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되 타당한 비판은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정착될 때, 전자민주주의는 미래학적인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열쇠는 바로 사이버 공간의 주인인 네티즌이 쥐고 있다. 네티즌의 자율성과 책임성만이 전자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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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29 23:02

[전북칼럼] BIS비율과 리스크 관리수준

'리스크' 혹은 '리스크관리' 등의 리스크 관련 기사들이 IMF관리체제 이후부터 최근까지 국내 경제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필자가 리스크관리업무를 맡다보니 주위에서 리스크관리 업무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리스크'란 '위험' 또는 '예상외 손실'이란 의미인데, 이 리스크를 구체적 금액으로 측정하고 적정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업무를 리스크관리라고 한다. 리스크는 신용리스크, 금리리스크, 유동성리스크 등 그 원인에 따라 여러 종류의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 중에 BIS자기자본비율과 연관이 깊은 리스크가 신용리스크이며 주로 대출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은행은 어느 정도의 손실을 예상하고 대출을 하지만 실제 손실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질 수가 있다. 갑작스럽게 경제위기나 불황이 닥치면 손실이 예상했던 규모보다 커지는데 이러한 예상외 손실을 평소에 측정하고 모니터링하고 은행이 부담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해 나가는 일이 신용리스크관리이다. 예상외 손실은 대출고객에게 금리로 직접 부담시키지는 않고 은행이 보유한 자본금으로 부담하게 된다. 예상외 손실규모에 비하여 은행이 보유한 자기자본 규모가 적정한지를 나타내는 리스크측정지표 중 하나가 BIS자기자본비율이다. 예금보장한도 축소계획이 발표된 뒤부터 BIS자기자본비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제는 시골 할머니도 은행에 예금하면서 '당신네 은행의 BIS가 얼마요?'하고 물을 정도이다.이렇게 리스크와 BIS비율이라는 단어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요즈음 은행 고객들이 BIS비율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사실 중 하나는 BIS비율이 높으면 해당 은행의 리스크관리능력도 높은가하는 점이다. 단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이다. 왜냐하면 리스크관리능력이 높으면 평소 부실이 날 수 있는 자산의 규모를 적절한 수준 이내로 잘 관리하여 당연히 BIS비율도 높겠지만 BIS비율은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높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행중 개인대출, 특히 주택담보대출을 많이 취급해 온 시중은행은 보유한 리스크관리능력에 비하여 BIS비율이 높은데 이는 주택을 담보로 대출할 경우 BIS비율 산출과정에서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리스크관리능력이 낮아 기업대출부문에서 큰 부실이 발생한 후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 자기자본이 많아진 시중은행들이 있다. 이 경우 일단 BIS비율이 올라가 건실한 은행으로 보이겠지만 문제는 공적자금을 받은 후 신인도 제고를 위해 해외 유명 리스크관리시스템을 비싼 값에 도입해도 리스크관리능력은 쉽게 향상되지 않는데 있다. '신토불이'란 말이 있듯이 외국의 선진 시스템이 국내 금융상황과 맞지 않는 점이 발견되고 있고, 또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가동시키는데 필요한 내부 역량과 데이터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스크관리능력이 조속히 향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BIS비율이 회복되더라도 이는 일시적으로만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은행이 리스크관리능력을 향상시키고자 원한다면 BIS비율 산출에서 유리한 특정대출만 늘리려하거나 화려한 시스템 구축에 앞서기 보다 최고경영층이 리스크관리 향상을 경영의 중요 목표로 삼고 이를 꾸준히 추진해 가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지 없이 그 외의 빠르고 쉬운 방법을 찾아 리스크관리 수준을 높이려 시도하거나 BIS비율 자체만을 높이려는 노력은 해당 은행의 이익만 떨어뜨리고 고객을 착각시킬 뿐이다. 따라서 고객 측에서는 은행의 건실도를 알기 위해서 BIS비율 뿐 만이 아니라 경영진의 리스크관리능력 향상을 위한 확고한 의지도 함께 점검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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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22 23:02

[전북칼럼] 문화정책의 기본방향

시민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문화는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의가 있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금기시(禁忌視)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문화는 인간이 소비하는 물에 비유될 수 있다. 원래부터 청정한 물과 오염된 물이 없듯이, 문화도 그것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좋게 변화하거나 나쁘게 변질될 뿐이다.이분법적 사고로 나쁜 문화와 좋은 문화로 분류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들이 알맞게 흘러갈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문화의 하수도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방향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식수를 공급하는 상수도 물과 생활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하수구 물이 있듯이, 상수도로 공급되어야할 문화와 하수구로 흘려보내야 할 문화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문화정책 수립자들은 대부분 이 점을 간과해 왔다. 우리 사회에 항상 좋은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나쁜 문화도 있고, 부정적인 문화도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문화와 더불어 생활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유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각각의 통로를 확보해 주는 일이다.오염된 폐수가 흐르는 통로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변은 온갖 폐수로 그득할 것이고, 그 폐수가 땅 밑으로 침투되어 맑고 깨끗한 지하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그 물은 상수도로 역류하여 식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문화의 흐름도 동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문화의 하수구가 폐쇄될 때 문화의 상수원이 오염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문화의 상수도가 본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하수구라는 배출구가 필요하다. 하수구로 유입되어야 할 문화를 배척하면서 그 통로를 봉쇄하면 그곳으로 흘러야할 저질문화들이 본격문화의 통로인 상수도를 침범한다. 부정적이고 이롭지 못한 문화를 하수도로 흘러보내는 정책이 수립될 때 우리 사회의 문화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그것은 깨끗하고 좋고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입보다는 해롭고 나쁘고 더러운 오물덩어리를 쏟아내는 항문이 그 기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자연스런 문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면서 유용하고 바람직한 문화로 가득 찬 사회를 꿈꾸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인류역사상 인간이 소망해온 이상사회가 실현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든 나쁘든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유통되는 것이 현실이다. 바람직하고 우량한 문화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다는 발상은 위험하다.우수한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이 군집한 생태계가 바람직하다. 인간사회의 문화현상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시민의 생활세계 속에서 숨쉬는 건강한 문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매카시즘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시민대중의 문화적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의심하는 전근대적이고 엘리트 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이, 문화의 흐름을 왜곡시키면서 그것의 배설구를 막아왔다.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구분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그 반대편을 배척하는 이분법적 문화선별주의를 탈피하여 다원주의적 문화정책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문화생산과 문화소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문화수요층의 선택권과 분별력을 존중하여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방향에서 문화정책의 기본방향이 수립되어야 한다.이러한 점에서 공연예술과 영상예술의 등급제를 보류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은 문화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규제와 억압으로 현안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반시대적 발상을 21세기 시민사회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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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08 23:02

[전북칼럼] 대통령의 의자

구세대들의 푸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나이 50대에 접어들어 집안의 가장으로, 직장의 상사로, 그리고 사회의 리더로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푸념이, 아니 불만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혹은 직장 상사로서의 권위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50대들의 하나같은 불만이다.일면, 그들의 푸념이 이해가 된다. 부모의 꾸지람을 듣기 싫다는 이유로 부모를 폭행하는 자식, 교사의 훈계에 앙심을 품고 경찰서에 고발해버리는 학생들의 뉴스가 떠들썩하게 들릴 때마다 기성세대의 '사라져버린 권위'가 안타깝게 여겨진다. '애비노릇도, 선생노릇도 못하겠다'는 50대들의 불만이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혹자는 '어른의 권위'가 무시되는 오늘날의 현상을 무분별한 서구화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서구의 '자유분방함'이 도를 넘어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서구의 '무질서'가 동양의 '질서'를 뒤흔들면서 '부모를, 스승을 존중하는' 미덕이 사라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서구사회를 들여다보면 부모 자식간의 관계, 선후배 사이의 관계,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 할 것 없이 모두 '질서'가 없어 보인다. 특히 미국의 경우, 종교적인종적 다양성과 자유주의적인 분권적 정치구조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이런 '무질서'를 견뎌낼 수 있는 내성(耐性)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에 대해 '권위주의'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인 조정과 합의의 과정을 존중하는 그들의 문화적 풍토는 '무질서'를 '다원적 민주주의'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기간 중에 참석했던 한 연찬회는 '과연 권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 식장에서는 클린턴을 포함한 5명의 연사가 연설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포함한 5명의 연사가 서게 될 행사장 연단의 뒤쪽으로 똑같은 모양의 의자가, 그것도 단 4개만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면서 다섯 명의 연설에 왜 네 개의 의자만이 필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다섯명 중 한명의 자리는 식장의 연단이 되고, 연설이 끝나면 다음 연설자가 일어난 자리에 앉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통령을 위한 특별한 의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도 다른 연설자와 마찬가지로 연설을 마친 후 빈자리에 앉아 다음 연설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 누구도 그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이끄는 미국 대통령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사회의 무질서가 아니라 '권위주의'의 옷을 벗은 진정한 '권위'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 스승으로서의 권위, 사회적 리더로서의 권위가 무시된다고 불평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자. 우리는 진정 권위의 상실을 염려하고 있는가? 혹시 아직도 '권위주의'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장으로서, 스승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리더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가? 혹시 그저 그 자리에 걸맞는 대접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우리는 산업화시기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일궈낸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권위'보다는 '권위 있어 보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렇지만 분명히 염두에 둘 것은 진정한 '권위'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능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지 외면으로 치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모양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알맹이 없는 권위주의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권위주의의 옷을 벗고 권위를 지켜야겠다. 아니 잃어버린 권위를 찾아야 하겠다./국회의원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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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9.01 23:02

[전북칼럼] 갯벌 보존과 간척사업

갯벌(干潟地)을 보전(保全)해야 한다는 의견과 간척(干拓)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특히 새만금 간척사업을 두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학계시민단체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다. 간척사업을 두고 이해 당사자는 물론 지역과 단체 및 계층 간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간척사업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식량안보와 물 부족현상의 해결 등 경제적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간척사업은 갯벌을 농지나 산업용지 등으로 만드는 단순한 매립사업이 아니라 국토를 효율성 있게 이용하여 국가발전에 필요한 토지와 식량수자원 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국토종합개발사업이란 설명이다. 간척사업을 통하여 식량증산 뿐 아니라 토지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자원 확보한발 및 침수피해 감소교통여건 개선관광 및 휴양지제공지역의 균형개발고용창출 등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간척한 땅의 가치는 단순히 농지로 전용한다해도 연구결과 갯벌에 비해 많게는 2.6(1999년 12월 세종대 주명건 교수)배, 적어도 1.4배(1999년 11월 중앙대 최재선 교수)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특히 국토의 65%가 산지로 경작지가 부족한 우리의 현실에서 간척사업은 필수란 주장이다. 갯벌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생태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로 얽혀 살아가고 있다. 무기물을 먹이로 해서 유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은 식물이다. 바다에서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주된 생물은 식물플랑크톤이다. 동물플랑크톤을 비롯해서 작은 생물들은 식물플랑크톤을 먹고 살아가고 작은 물고기는 동식물플랑크톤과 작은 생물을 먹고 자라며 큰 물고기는 보다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해서 생육번성해가기 마련이다. 식물플랑크톤이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일은 태양에너지가 근원이 된다. 태양에너지는 바다 물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힘이 약해서 물 속 1m가 되면 55%, 10m는 36%, 100m에선 2%로 급속히 감소한다. 조류(藻類)가 수심 200m 이하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여기에 있다. 갯벌은 물이 찰 때 수심이 수m 이내의 얕은 바다인 데다 식물플랑크톤이 번식하기에 알맞은 수온과 풍부한 무기(無機) 영양염류를 품고 있다. 갯벌은 또한 천연적인 하수처리장이다. 하천으로부터 유입되는 오염물질들은 갯벌에서 분해된다. 이렇게 해서 갯벌 속에 쌓인 영양소는 생물의 먹이가 된다. 간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갯벌의 기초생산력은 연근 해와 대륙붕에 비해 5-10배에 이르며 이를 생물량(biomass)으로 환산할 때 연근 해의 90배, 외양의 300배를 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갯벌이 짧은 기간에 만들어 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바다에 생명력을 주는 갯벌은 적어도 수 백년에 걸쳐 만들어진다. 최근 우리나라 연근 해 어업생산량이 크게 감소된 것은 계획성 없는 간척의 결과란 주장이다. 그래서 갯벌은 농지에 비해 3.3배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연구결과(1996년 12월 한국해양연구소 이흥동 박사)란 설명이다. 갯벌은 생명탄생의 모태(母胎)이자 바다 생물의 보고(寶庫)란 이야기다. 또한 간척사업은 지역 어민들에 대한 보상을 비롯해서 간척후의 수질관리 등 잡다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비교적 규모가 크고 공사기간이 길어 임야를 개간하는 일에 비해 돈이 많이 든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애초 8천2백억 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2조2천1백37억 원으로 대폭 늘어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란 설명이다. 더욱이 새만금호 수질개선을 위하여 들어갈 추가비용이 수조원대에 이를 것이란 주장이다.갯벌보전과 간척사업을 두고 이와 같이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갯벌과 간척을 보는 시각이 다른데 있다. 생산 가치만을 따지면 간척이 유리하고 환경과 생태계 파괴 문제에 무게를 두게되면 경제적 가치마저 갯벌보전 쪽이 커지는 것은 여기에 있다.따라서 갯벌보전과 간척사업의 추진에 철학을 확립해야한다. 60, 70년대 식의 개발 위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지구적인 차원에서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비중을 둘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아닌 우리의 후대를 내다본 장기적인 안목에서 종합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업 초기부터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지자체의 협조와 이해 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새만금을 포함한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간척사업에 대해 종합적인 재검토가 있어야겠다./이광영(전북대 자연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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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08.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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