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조(宣祖) 때 일이다. 선조가 어느날 밤 민정을 살피기 위해 암행에 나섰다. 남산골을 지나다가 한 선비의 청아하고 낭랑한 글 읽는 소리에 이끌려 발길을 멈추었다. 선비는 학식도 풍부했고 됨됨이도 비범했다.
선조는 그 선비를 등용시키고 싶은 생각에서 “만일 정6품인 이조좌랑(吏曹佐朗)을 시켜준다면 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비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5품인 정랑(正郎)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품계는 정1품인 영의정까지 올라갔고 그것도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왕은 최후로 물었다. “그렇다면 왕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지금까지 대답만하던 선비는 벌떡 일어나 “이런 역적놈! 성군(聖君)이신 우리 임금을 배반하고 날더러 반역을 하란 말이냐”며 선조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만 혼비백산해서 도망나온 선조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그 선비는 충성심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튿날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말 정6품인 좌랑에 임용했다. 임금의 뺨을 때리고도 벼슬을 얻었다는 일화 한 토막이다. 조선시대 관직은 종9품 참봉(參奉)에서 정1품 영의정(領議政)까지 18등급으로 돼 있다. 벼슬길에 나서기도 어려웠고 승급도 어려웠다. 지금은 별정직 공무원을 제외한 일반직 공무원은 9급 서기보에서 1급 관리관(차관보급)까지 9등급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르면 내년부터는 중앙부처 국장급이며 부이사관급인 3급이상은 계급제가 폐지되고 직무내용과 성과에 따라 등급과 보수를 결정하는 이른바 미국식 ‘직위 분류제’가 도입될 것이라는 중앙인사위의 방침이 발표돼 공무원들은 물론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왕조(王朝)시대 이후 수백년간 유지돼온 관료 인사제도의 골간을 바꾸는 것으로 그에 따른 파장과 진통도 만만치 않을 예상이다. 상급자가 없는 마당에 지휘통솔도 문제이고 공직사회 불안도 무시할 수 없는 점이다. 시행에 앞서 보다 치밀하고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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