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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직업윤리

시랑당도(豺狼當道)한 데 안문호리(按問狐狸)냐. 다시말해서 이리와 승냥이떼들이 정치를 하고 있는 터 에서 어떻게 여우나 살쾡이의 죄를 묻겠느냐는 말이다.

중국 옛 고사에는 매감자언(賣柑者言)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어떤 귤장사가 귤 한상자를 팔았는데 산 사람이 가지고 가서 보니까 많이 썩었다고 와서 불평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세상이 다 썩었는데 그것은 말하지 않으면서 내 귤 몇개 썩은 것만 가지고 말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중국에서 요즘 장쩌민 정부는 부패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것 같고 보통 “재수없이 걸렸다”는 말을 흔히 듣는 남한에서도 부패방지법 제정 운운하는 모양이다.

최근들어 중국에서는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청커졔라는 사람을 독직사건으로 처형했고(고위층으로 처음되는 일) 필리핀 대통령 에스트라다도 부정뇌물 사건으로 쫓겨날 지경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정도의 국가 기강이 서 있지 못한 형편이 안타깝다.

 

 

폐일언하고 결론부터 말하겠는데 이 세상에는 보이는 법정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역사의 법정이 있고 개인 양심의 법정도 있다. 그렇다면 보이는 법정보다 무서운 것이 역사의 법정이고 또한 양심의 법정이다.

사람이 자기 양심의 법정에 자신을 피고인으로 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데 문제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로부터 탐관오리도 많았지만 양심을 지키는 청백리도 더러 있었고 춘추시대 제나라 관중이나 포숙 또 진(秦)나라 건숙이나 맥리해는 서로 재상자리를 두고 양보하기도 했다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세태에서 직업윤리같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천직(天職)이라는 말은 외국 말로 콜링( calling) 또 베루프(Beruf)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나는 그 일을 하라고 부르셨다는 뜻이다.

이는 물론 특수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직업윤리적으로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스스로 소명감 같은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혹 결혼 주례사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신랑, 신부에게 이런 권고를 한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직접적으로는 부모님의 은덕으로 자라고 교육을 받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간접적인 면에서는 여러분에게 국가와 사회가 크게 영향을 주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님에게는 말할것도 없지만 장차 무슨일을 하든지 그 직업으로 국가와 사회에 도움을 주고 보답하겠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이런 정신의 소유자라 하면 그가 어떻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를 하겠는가?

 

 

공자가 한번은 무성이라는 고을을 다스리게 된 제자 자유(子游)에게 묻기를, 사람을 얻었는가(得人羊)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잇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사가 아니면 제게 오지를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사이길로 다니지 않는다는 말은 관리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길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사는 나라나 백성에 관한 일을 말하는데 담대라는 사람은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 결코 사사로운 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또 직업윤리적으로 당연한 처사이기도 하다.

 

 

옛날 시골 어른들이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누가 하면 “국 간 맞은 소리를 한다”고 하던 말을 듣고 자랐다. 이는 국에 간을 맞춘다는 뜻으로 처설이라 한다. 지금 사람들은 안쓰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국 간 맞은 소리’즉 현대감각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겠다. 필자는 좀 젊어서 교역을 할 때 교회청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이 크리스챤으로서 장차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내게 있는 지식, 기술, 능력, 재간 등 그런 것들은 하느님께로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각기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 왜? 그것을 하느님께로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보수라는 것이 필수 조건으로 따르지 않는다. 내가 먹고 살만한 형편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어느 일터가 있다면 무보수라도 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처지에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만 부득히 봉급을 받는다는 이러한 자세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직 또는 사명감에 대해 보다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가는 필자의 철학이다.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말한대로 정치는 철인이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강희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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