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18 03:38 (Tue)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사회 chevron_right 사회일반
일반기사

[원로에게 듣는다] (1) 황인성 前국무총리

 

 

최근 우리사회는 세계화 정보화 등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크게 변하고 있다. 기본과 원칙을 존중하기 보다 편리하고 이기적인 세태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

 

빠르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다 보니 고유의 전통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버린 느낌이다. 따라서 원로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경험과 경륜을 통해 지혜를 구해보기로 했다. 후생들이 삶의 가늠자로 삼았으면 하는 뜻에서다. (편집자주)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할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필부(匹夫)는 말할 것 없고 일깨나 했다는 사람도 돌이켜 보면 한 줄기 족적을 남기기 힘든게 세상사다. 그 족적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었다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인성(黃寅性) 전 국무총리는 어려운 시대를 관통하며 다양한 경륜을 쌓은 대표적 인물중 하나다. 그는 일제통치와 해방공간을 지나 개발연대와 민주화 시대를 살아냈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헤치며 고비마다 중요직책을 두루 거친 것이다.

 

군(軍)과 관(官)을 섭렵하였고 정계와 재계에서도 기둥 역할을 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전라도 정서에 배치되는 점도 없지 않은듯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공직생활 50여년을 깨끗하고 한결같은 자세로 임했다.

 

황 전 총리는 요즘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매일 출근을 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빌딩 18층 아시아나항공 고문실을 찾았다.

 

비서의 안내로 고문실을 들어서자 황 전 총리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예의 근엄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연세에 비해 얼굴빛이 좋아 보였다. 대강 건강 등 안부를 물은 후 고향 얘기로 부터 말머리를 시작했다. 고향에 대한 정이 누구보다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무주 무풍면 증산리 석항마을은 풍수가들 사이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꼽히는 곳. 지금도 선산이 있어 가끔 들린다고 한다.

 

황 전 총리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 가운데 관선시대 가장 오랜 전북지사(1973-1978)와 문민시대 초대 총리(1993)를 지낸 점이 눈에 띤다. 전북지사로 부임한 것은 그의 나이 47세때.    

 

“그때야 말로 전북은 낙후된 도(道)였습니다. ‘호남푸대접’이란 말도 많았지요. 그래서 공업화 추진이 지사로서 제1 목표였습니다.”

 

때 맞춰 호남고속도로(2차선)가 막 개통되었다. 그는 익산과 군산에 공장을 유치하기로 맘먹고 일을 시작했다. 우선 2차선인 전주-군산간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일에 착수했다. 맨 먼저 도에 있는 트럭을 모두 집결시켰다. 바로 흙을 파다 한쪽부터 4차선으로 넓혀 나갔다. 무조건 벌여놓고 보자는 배짱이었다.

 

한 100m쯤 넓히고 나서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비서관을 만나 “정부가 전북을 도와준게 뭐냐”고 묻고 “대통령께 그대로 보고하라”며 내려와 버렸다. 그렇게 해서 생긴게 오늘의 전군간 4차선이었다.

 

황 전 총리는 전주철도 이설문제며 이리역 폭파사고, 새만금 착수 등 얘기도 술술 풀어냈다. 착수한 햇수까지도 정확히 짚어가며 설명해 나갔다. 최근 다시 전주시의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전주철도 이설문제도 비화중 하나라며 들려줬다.

 

박대통령이 초도순시차 전주에 내려오자 “철도부지를 팔아 그 비용으로 철로를 외곽으로 이전하면 돈이 들지 않는다”고 설득했다는 것. 대통령이 긍정적인 언질을 주자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을 갖고 이 사업을 발표해 버렸다. 지방신문들이 1면톱으로 받았음은 물론이다.

 

새만금사업은 지사시절 계화도간척사업을 마무리 짓고 다음 사업으로 구상한 것이다. 농림부장관으로 가서 새만금을 추진하려니까 경제기획원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농림부가 갖고 있는 농지대체자금을 활용해 추진토록 했다.

 

새만금에 대해 그는 강한 애정을 표했다. “이 사업은 전두환대통령이 승인했고 노태우대통령때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김영삼대통령이 계속 추진했고 김대중대통령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환경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전북발전의 역사적 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 그러면서 단순 농지로 개발하지 말고 다목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어 총리시절 얘기를 꺼냈다. 장상 총리서리가 낙마하고 장대환 서리가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시점이어서 더 의미가 있을듯 싶어서였다. 

 

당시 황 전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대선 당시 민자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도와줬을 뿐이다. 그러던 1993년 2월 총리자리를 맡아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밤새 얘기를 나눈후 수락했다.

 

“문민정부가 국민들로 부터 1997년 외환위기를 가져왔다고 비판을 받고 있지만 초기에는 청렴한 자세,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군부 쇄신 등 실적도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99명의 인명을 앗아간 서해 훼리호 사건과 아시아나항공기의 목포추락사건 등 가슴아픈 일도 많았다고 털어 놓았다.

 

이쯤해서 황 전 총리에게 묻고 싶은 말을 던졌다. 공직자의 자세랄까 하는 조금은 추상적인 명제였다. 그의 경륜에 비추어 꼭 듣고싶은 대목이었다.

 

“공직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고 봐요. 요즘 비리사건을 보면 공직자 보다는 권력을 이용해 사업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공직자는 첫째로 사심(私心)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정해진 법규대로 정당하게 처리하는게 중요합니다.”

 

공직자들은 ‘성직자와 같은 생각과 신념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황 전 총리는 전북지사 부임시 지역에서 보내준 돈을 모두 양로원에 보내고 돈 준 사람들에게 처리결과를 통보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또 지사 이임시 받은 전별금을 장학기금으로 내 놓기도 했다. 선친이 들려준 ‘물러날 때는 폐리(헌신발)처럼 버리고 떠나라’는 말을 실천한 셈이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황 전 총리는 한번도 곧곧한 자세를 흐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내 경어(敬語)를 쓰는게 인상적이었다.

 

황인성 前총리는?

 

황 전 총리는 산간오지 마을의 대명사인 무주출신이다. 조부 황대연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 무주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전사했다. 부친 황영수는 유림(儒林)이었다.   

 

황 전 총리에 따르면 조부가 의병활동을 하면서 군량미를 구하기 위해 차용증을 써줘 조부 사후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밭 한뙈기 없는 빈한한 생활인데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고학을 하다 일제의 소개(疏開)에 의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중 해방을 맞는다. 건국을 위해 중요한 것이 국방이라고 생각하고 47년 육사를 4기로 졸업했다. 군생활 20여년을 오직 경리장교로 보냈다.

 

휴전직후 2년간 미 육군 경리학교에 유학했으며 귀국후 3군 장성들을 상대로 현대경영관리법을 강의했다. 군내 제일의 ‘경제통’으로 통했으며 이때 강의를 들은 ‘학생’중 박정희 준장도 끼어 있었다. 5·16후 그의 능력을 필요로 했던 주체세력은 그에게 전력회사 통합을 맡겼다.

 

오늘의 한전은 그가 만든 작품이다. 또 외자청(현 조달청)의 기틀도 마련했다. 1968년 국방부 재정국장을 끝으로 소장으로 예편했다. 곧 바로 김종필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6개월만에 박대통령 지시로 전북지사를 맡아 5년3개월이라는 장수기록을 세운다. 교통부장관을 거쳐 10·26과 함께 신군부의 끈질긴 권유로 민정당 전북지부장을 맡는다. 고향에서 11대와 12대 국회의원에 거푸 당선되며 1985년엔 농림부장관으로 두번째 각료생활을 하게 된다.

 

1988년엔 아시아나 항공 창설책임을 맡아 6개월만에 여객기를 이륙시키고 1년만에 국제선에 투입, 세계항공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공천을 받아 황색바람을 뚫고 당선됐다.

 

1993년 문민정부 첫 총리로 취임한다. 호남총리로는 세번째다. ‘주부총리론’을 펴며 조용히 국정을 챙겼다. 그러다 UR 파동 책임을 지고 10개월만에 물러났다. 1994년 전북대에서 명예행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6년 금호그룹 고문으로 영입되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끔 골프장에 나간다. 3남1녀를 출가시키고 군포에 있는 아파트에서 부인 이애섭여사(72)와 단둘이 살고 있다.

 

산사랑 실천(미니) "산의 해 추진위원장 맡아"

 

“내가 태어난 곳이 산 아니요. 대한민국에서 무주 구천동하면 산골짜기중 산골짜기니까…”

 

좀처럼 쓰지 않던 감투(2002 세계 산의 해 추진위원장)를 기꺼이 맡게된 이유가 뭐냐고 묻자 웃으며 뼛속깊이 산골출신임을 드러낸다. 공직을 떠난후 과천의 청계산을 찾다 이제는 군포로 옮겨 수리산을 매일 오른다.

 

“산에 들어서면 마음이 맑아져요. 산을 푸르게 만들자고 이런 일을 하게돼 기쁩니다.”

 

전북지사 시절 나무심기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농림부장관때는 내무부에 있던 산림청을 농림부로 옮겨오는 등 산과는 줄곧 인연을 맺어왔다.  

 

“산은 한번 타면 100년이 지나야 복원된다”며 이번 대선에서 정당들이 산을 푸르게 만들겠다는 공약을 하도록 건의문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4월식목일에는 산림헌장을 선포했고 9월에는 ‘산의 날’도 지정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상진 chosj@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사회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