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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사람들] 군산 강근호시장의 3형제

 

 

국가에 대해 이 정도 노를리스 오브리제를 다 한 집안이라면 대대손손 족보를 자랑하는 여느 문중 보다 훨씬 자랑스런 명문가가 아닐까. 

 

2선을 통해 현재 군산시 시정의 사령탑에 앉은 강근호 시장. 7순을 불과 두 해 앞둔 강시장은 노구에도 하루하루가 힘차고 엔돌핀이 솟는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앞길이 막막했었지만 이제는 평생의 소원 고향 발전을 책임지는 공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백절불굴의 강시장과 그의 용감한 형제들 ! 오늘의 그들이 있기까지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의 선친 필문씨( 1892년∼1960) 의 고향은 원래 군산이 아니었다. 무신이었던 8대조까지는 옥구군 회현면 학당리가 터였으나 사화에 휘말리면서 부산으로 유배를 갔다는 것.

 

지금의 태자리인 군산시 성산면 고봉리에 재정착을 한 때는 그로부터 1백40년 뒤라 한다. 강시장의 선친은 부산상고(1회)를 졸업하고 일본 오오사카 관서대 상과를 졸업한 재사였다. 젊은 시절 그는 조흥은행 전신인 호서은행 대부과장, 수산업 등을 거쳐 금광을 찾아 30대에 잊어버렸던 선대의 땅을 밟았다.

 

웬만큼 부를 축적했던 그는 해방 이후 공직에 투신하게 된다. 미 군정서 덕망있는 지역인사를 발탁하는 방침에 3년여 면장을 지냈다. 당시 면장이면 위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는 경영하던 광업소에 야학을 개설해 농촌주민 계몽운동에 나섰고 수시로 불우이웃에 재산을 풀었다.

 

그의 큰 덕은 나중에 큰 아들 근호씨가 국회의원, 시장 출마 때 알게 모르게 곱절로 되돌려 받았다(?) 고.

 

그는 이 뿐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 후 호국군 제가 창설되자 과감히 면장 직을 버리고 조국 방위수호차 54세 나이에 기꺼히 뛰어들었다. 당연히 최고령이었다. 아들뻘 되는 동료들과 기꺼히 훈련을 함께한 그는 제1기로 소위 임관을 했고 이리에 주둔한 103연대에서 그는 교육관으로, 또 향토 방위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6.25 직전 호국군 제가 해체되는 바람에 그는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되돌아 왔으나 인공 시절 애국 활동 댓가로 깊이 피난을 해야 했고 온 가족이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강면장의 처가( 부인 장분례씨, 1889∼1978) 또한 애국 정신에는 남다른 집안이었다.  일제 학정이 극에 달하던 30년대 처가가 있던 경북  울진 (당시는 강원도) 에서는 항일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사건의 주모자들이 바로 두 처남 장사덕, 사영 형제들이 었다. 

 

이들은 일경에 쫓겨 만주땅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다. 훗날 중국 정부로부터 항일 국가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귀국치 못하고 별세했다. 지금은 그의 자손들만이 심양,하얼빈 등에서 학교장 등으로 활동하며 예우를 받는 조선족으로 남아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강시장이 현지를 방문, 군산시와 북해시 간에 우호협력도시를 체결하는데 역할을 단단히 하기도 했다.

 

강면장은 슬하에 1녀 3남을 뒀다.

 

군산여고를 졸업한 장녀 성옥씨는 3년전에 작고했고 사위 차두홍씨는 선전특선작가로 중등교장 퇴직후 지금도 미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삼성엔지니어링 이사 등 손자 둘이 있다.

 

이후 내리 3남들은 명문 군산고가 자랑하는 인물들. 민주 투사에다 각각 전문가로 중앙 무대서 전북을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이다.

 

중대 법대를 졸업하고 그 대학서 석사를 취득한 근호씨는 총학생회장, 교수, 교무처장 등 정통 중대맨. 임영신 총장 (전북 출신)이 양아들로 여길만큼 총애를 받았던 그는 37세 한창 젊은 나이에 8대 국회의원에 진출했다.그러나 그런 유망한 청년 정치인은 유신으로 그만 처절하게 꺽이고 만다.

 

30년만인 지난해 마침내 빼앗긴 금뱃지 대신 30만 시민의 봉사자 자치단체장으로 돌아왔다. 군산고와 중앙대 총동창회장, 진주 강씨 은열공파 대종회 회장, 반도조선아케이드 대표이사 회장 등 경력은 화려하다 못해 이력서에 다 기재하지 못할판이다.

 

경남 김해 출신인 부인 김옥분씨는 남편의 정치적 박해에도 묵묵히 가정을 지킨 여장부로 이대 법대를 나와 고교교사, 이대법대 동창회장 등 남편 못지않게 화려하다. 슬하에 음악 전공의 인숙씨,방송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만훈씨, 재미 사업가로인 만웅씨, 부친을 음으로 양으로 도우면서 개인 사업 중인 만우씨등 1녀3남이 있다.

 

2남 춘호씨(65)씨는 고대 상대를 나와 정통 은행 맨으로 퇴직했다. 차장 승진 3일 만에 반독재 투쟁에 나선 형님 근호 씨 때문에 취소 처분을 받기 시작해 한직으로 돌고 돌았고 항상 검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하지만 워낙 은행 내에서 능력과 청렴성을 인정받은 그는 86년에 호남 출신으론 드물게 상업은행 상무로까지 진출했다. 때만 잘 만났으면 행장까지도 가능했다는게  주변의 그에 대한 인물 평이다.

 

3남 인애씨(62)는 더욱 억울하다.

 

고대 법과 4년 재학 중에 현 대법원장과 동기인 14회 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재사였다.서울대 사법대학원을 거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유망주로 32세에 경기 여주지원장을 거쳐 서울지법 판사로 재직 중 장형 근호씨 때문에 판사 재임용을 받지 못하고 법복을 벗어야 했다.

 

사법 사상 첫 케이스였다. 원래 이름이 창호였던 그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이름을 인애로 바꿔 버리고 한 때 사회를 비관해 등지고 생활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승화시켜 학문에 정진했다. 조세법1∼7권, 소득세법 학설 판례 실무, 조세갱생법 등 20여권의 저서를 냈고 객관식 사시문제집은 수험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세법에 관한 한 그는 지금 국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요즘은 마음을 비우고 변호사 활동과 종교 생활에 심취해 있다.

 

원래 불교였던 강시장 일가족들은 78년 4월 부활절에 유신이 절정이던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만다. 

 

똑똑한 이 3형제를 키우낸데는 물론 어머니 장분례여사의 뜨거운 사랑과 공력이 숨어 있었다. 장여사는 매일같이 기도를 통해 ’큰 아들은 대통령, 둘째는 은행장, 셋째는 대법원장’소원을 빌었다.

 

자식들이 수난당하는 기간에도 실망의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절대 박정희를 욕하지 말라“고 자식들을 타일르기까지 하셨다고  형제들은 어머니의 넓은 사랑정신을 회고했다.

 

강의원과 유신체제

 

72년 10월17일 이른바 유신은 강근호의원의 인생 운명을 바꾼 날이다.

 

30대에 금뱃지를 단 그는 혈기방장했다. 71년5월 8대에 입문한 그는 초선에도 워낙 다부진 의정활동과 사나운 입으로 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을 맡았다. 상대 공화당과 정부로선 눈에 가시도 보통 가시가 아니었다. 그가 의원, 법조계,언론계 등으로 구성해 만든 목요회는 중앙 정치 무대서 최고의 영향력있는 클럽이었다.

 

강의원은 동료의원들이 거론조차 무서워하는 당시 북파 요원들의 소요 사태인 실미도 사건에 대해 통렬히 따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의정 단상에 올라만 가면 정부 각료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교육위 감사를 마치고 대구 감사장으로 향하던 중 그는 승용차 안에서 라디오를 통해  국회해산과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들었다. 서울 톨게이트에서는 이미 그를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빙고 보안사에 끌려간 그는 7박8일 동안 전기고문, 잠안재우기, 물고문을 당했다. 학창 시절 축구로 누구 보다 몸이 다부졌던 그는  이후 평생 지팡이 신세를 지게 됐다. 말하자면 리틀 DJ가 된 셈이다.

 

김상현 ,조윤형 등과 함께 반유신 수괴로 몰린 그는 가택연금, 정치활동금지 , 투옥 2차례 등 숱한 박해를 받았다. 미국의 프레이저 민주당 상원의원 등은 직접 방한, 그를 격려했고 한국의 독재 정권을 세계에 고발하기도 했다.

 

그가 시장으로 정치적 재기를 하기까지는 무려 한 세대인 30년. 7전8기 끝에 성공한 오똑이 인생이었다.

 

지난해는 민주화 보상심의위로부터 마침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한을 풀 수 있었다.

 

지난 보궐선거와 6.13 선거 당선 후 ” 남은 인생 잘사는 위대한 군산 건설을 위해 천지신명께 몇번이고 다짐했다“는 강시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면 월명공원을 산책하며 시정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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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탁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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