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 전주대학교의 'NGO지도자 아카데미'에 나가기 위해 나는 박원순 변호사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차병직변호사의 ‘NGO와 법’을 읽었다.
두 분 모두 법조계의 젊은 후배들인데, 어쩌면 그렇게 공부도 많이 하고 글도 잘쓸까 하고 감탄을 하면서, 이 다음 글을 쓸 때에 그분들의 책에서 인용을 해야겠다고 밑줄까지 쳐두기도 했다.
그런데 차 변호사 쪽에서 먼저 내 말을 인용한 글이 신문에 났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라고 했으니, 고문한 놈은 그냥 두고 고문 당한 사람이 헌법을 어긴 셈이 된단 말인가”
전에 회식자리에서 내가 한 말을 그는 글 첫머리에 얹어놓았다. 최근 서울지검에서 터진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칼럼이었다.
한때 정권유지수단 악용
7·8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는 고문이 정권의유지·방어·연장이라는 정치적 목적, 즉 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일상화 되었다.
혹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고문을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풍조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 1986년의 부천서 성고문사건, 그 다음해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이 용인되는 시대는 갔다. 인권을 최상위의 가치로 받들다 보니, 오히려 기본권의 존중이 사회질서와 정책추진을 약화시키는 상황마저 빚어지는 실정이다.
적어도 국제앰네스티가 말하는 ‘국가정책이 되어버린 고문’은 없는데도 살인을 부른 고문이 행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는 고문사건이라면 정보기관이나 경찰같은 데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고, 검찰은 이를 단속·처벌하는 기관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검찰마저도 고문의 온상임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검찰마저도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실망과 개탄은 예전보다 훨씬 강하다.
사실 지금까지는 고문의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번엔 가해자가 밝혀진데다 이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감독자의 지위에 있는 상급자들이 줄줄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검찰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검사가 고문과 관련하여 구속되었고,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사임했다.
흉악범 수사에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고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만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면 민주주의나 기본권은 사망신고를 내야 한다.
국민기대 저버린 검찰
검찰은 나의 친정이다. 젊은 시절 몇 해동안 검찰에 몸담았던 나로서는 지난날의 군사통치하에서 검찰이 보인 주구성(走狗性)에 남달리 착잡했다.
마찬가지로 민주정부시대가 열린뒤에도 검찰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딴전’을 부리곤 할 때 참으로 기가 막혔다.
불법을 퇴치해야 할 검찰이 불법의 주범이 되고, 말썽을 가려주어야 할 검찰이 말썽의 주역이 되어버린다면, 국민에 대한 배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검찰에서 구타뿐만이 아니라 물고문까지 자행되었다고 한다. 각종 고문 피해자의 실토가 이어지고 있다.
검찰은 말로만 겸손이니 뼈를 깎는 무엇이니 하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민주 검찰의 참 모습을 실증해 보여야 한다. 좋은 머리에 그릇된 오만이 겹치면 남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파멸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일각에선 고문방지특별법 제정을 말한다. 특별법으로 고문을 막을 수 있다면 백번 입법을 해도 좋지만 그건 아니다.
고문 관련자에 대한 엄벌은 물론 법원이 자백의 임의성에 대하여 엄격한 판단을 하여 강요된 자백의 무용함을 알게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아직도 고문이 행해지다니―이것은 변하지 않은 범죄성이다. 그것도 검찰에서 죽음까지 부른 고문을 했으니 인권이 뒷걸음 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화의 다른 면도 있다. 고문의 실상이 검찰 자체에 의하여 밝혀져 관련자가 구속되었으며, 상급자가 인책사임을 했다.
고문사건을 대서특필한 언론들은 국민들의 분노를 대변하듯 많은 쟁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정도라도 우리 사회가 변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변하지 않은 것을 변하게 하고 변화된 부분을 더욱 더 변화시켜나가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한승헌(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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