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묶음을 받아들고 잠시 아연했던 두 주일 전이 새삼스럽다. 나는 편지를 들고 녀석을 기억해내기까지 며칠을 꿍꿍거렸다. 학과는 달랐어도 가끔 나를 찾아와 이런 저런 허튼 얘기를 나누던 녀석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의 십이 년 후배였다. 졸업후 불쑥 군산 공항에서 마주친 녀석의 머리는 박박 깎은 중머리였다. 나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군산에서 제주행 비행기는 이륙이 곧 착륙이다. 녀석과 허튼 얘기를 몇 마디 나누고 나는 의자를 뒤로 뉘었다. 설친 새벽잠을 보상받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마치 먼 길 떠난 친구가 금방 방문을 두들기는 듯한 그런 어조로 녀석은 이야기를 풀었다.
은행잎이 아주 샛노랗게 가을비에 흠뻑 젖는 계절이었다고 한다. 녀석은 대학법회 담당이었다. 신사(神社)였던 도량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텨 서 있었다.
“종치기와 팬 마당의 흉한 상처를 싸리비로 골라 쓰는 것이 내 일과였어요.”
그 해 늦가을 저녁, 비 끝의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교교한 달빛이 법당 안에 가득한 밤이었다. 홀로 법당에 가부좌를 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화들짝 일어나 종각에 올랐다. ‘데에엥, 뎅’ 스물여덟의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마지막 자지러질 때까지 녀석은 그 긴 여운을 오래 음미했다고 한다.
“뭘 그리 골똘해요?”
토요일마다 찾아오던 미쓰였다. 녀석은 어색하게 마른 손만 부볐을 것이다. 월급날이면 거절하는 팔을 끌어 저녁을 사거나 이것저것 말꼬리를 잡아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가 그날 밤은 종각 주변만 맴돌더니 불쑥 ‘첫사랑은 풋사랑이냐고.’ 물었단다.
녀석이 ‘풋’ 웃고 손을 저었을까.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기억이 희미하다. 묵묵히 달을 우러르던 그녀가 돌연 팔에 매달렸다는 거다.
“지도해 주세요. 제 여분의 인생을.”
‘여분? 진짜 인생은 끝난, 덤으로 사는 여자 아녀?’ 입가에 뱅뱅 도는 이 말을 끝내 삼킨 채 나는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맹물처럼 말갛기만 한 그 무렵, 녀석에게 한 인생을 감당할 지도는커녕 미쓰를 넘볼 숫기나마 있었을까. 가난한 종지기에게 지도받을 여분(餘分)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깨에 기댄 그녀의 무거운 머리를 고쳐 세워 코끝에 스미는 냄새를 떨쳤다. 그녀의 손금 속에 묻힌 인연의 강줄기를 살폈다던가. 아마 그런 자세로 그 둘은 그날 밤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었는지, 아리송하다. 다만 쏟아지는 달빛이 보료처럼 푹신하고 아늑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눈동자 속에 달이 뜨는 것을 그날 밤 처음 보았네요.”
“알만 하구먼.”
비행기 날개 밑으로 풀린 솜조각 같은 흰 구름 덩어리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후 두 사람은 제각기 일터 따라 그녀는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강남으로, 녀석은 만행을 떠났다. 그리고 서로 바람결에 소식을 듣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 무렵 딱 한번 그녀가 산골로 찾아왔었다고 했던가. 산골은 해가 일찍 진다. 막차를 남기고 그녀가 엉덩이를 털었다.
“가려고?”
“네.”
대답은 확실한데 걸음은 미적거렸다. 동구 밖 버스길에 이른 그녀가 가슴을 확 밀치더니 냉큼 막차에 올라타더란다.
“에라 이 뒈져라, 이 멍청한...”
그러고도 세월은 또 김기림의 “길”처럼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녀석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랬는데 그렇게 계절에 기대어 휩쓸리는 어느 여름, 녀석은 무슨 수련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틀에 박힌 산문을 벗어나 세상 속의 수련관에서 탈속을 시험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녀석은.
“그랬을 껴.”
내가 맞장구를 쳤다.
저녁 기도를 마친 명상의 집 창문에는 장마 끝의 물끼를 턴 보름달이 하얀 박 덩이처럼 환하게 떠 있었다. 황량한 중천에 피어나는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터진 밤하늘이 청둥오리 머리처럼 깊푸르다. 녀석은 달빛에 이끌려 무작정 뛰쳐나갔다고 한다. 나는 듣기만 했다.
풀잎이 이슬에 젖어 빛나는 소나무 숲의 낮은 둔덕너머로 멀리 펼쳐진 너른 들에는 물안개 같은 달빛이 가득 고인 밤이었다. 녀석은 생각 없이 스적스적 대밭 모퉁이를 감아 돌았다. 저만큼 앞서 걷는 그림자 하나도 하얀 화폭처럼 막막하게 보였다.
“나는 그저 뚜벅뚜벅 그림자를 비켜섰거든요.”
순간 스치는 냄새, 아련한 기억 속의 ‘샤넬 넘버 화이브’.
“아니 이게...?”
달빛 속에 드러난 얼굴은 그녀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화들짝 놀란 반가움이 지난 세월의 긴 강물을 훌쩍 뛰어넘을 듯 했다.
“달빛에 이끌릴 줄 알았어요.”
참가자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며 그녀가 올려다 보더란다. 함박웃음 속에 감추어진 은빛 어금니도 옛 그대로였다고 녀석이 중얼거린 것 같다.
사위는 고즈넉하고 달빛은 요요하였다. 녀석은 참으로 오랜 세월의 단절이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눈물인지 모를, 하얀 달빛에 반짝 빛나는 검은 동자를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조금 전에 멈추었던 밤새가 다시 소쩍소쩍 울기 시작하더란다.
명상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녀석은 오래오래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진실로 아니 보았으면 좋았을 그녀의 뒷머리에는 둥글고 굵직한 쪽머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멀리 바람결에 지나치는 아련한 소문만으로도 감미로웠던 그런 지난 세월의 무게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녀석은 가슴으로 들었다고 했다.
제주공항이 가까워 진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매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녀석은 뜻 모를 웃음을 남긴 채 공항을 떠났다.
나는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와 개학을 맞고 또 방학이 시작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나는 녀석을 까맣게 잊었다. 그런 내게 불쑥 배달된 소포 꾸러미를 헤치며 나는 간신히 녀석을 떠올렸으니 망각했다는 편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소포꾸러미에는 내 얘기를 많이 들었다는 낯모를 쪽지와 함께 적절히 처리해 달라는 편지가 수북했다.
“지켜 볼 줄 알았지요. 그게 헛 기대였지만요.”
나는 짐짓 회한 같은 게 배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며, 아니면 반드시 그러하기를 기대하며 읽었다.
녀석의 49재를 치른 후 쓴 쪽지였다. 정갈하게 출력된 하얀 편지지에는 흐릿한 얼룩이 몇 군데 번져 있었다. 매몰차게 돌려세운 날 늦은 밤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발신인을 상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달이 푸른 밤 하늘을 줄달음쳐 흘러간다. 아찔하게 비껴갔을 두 사람의 순간들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지켜봐 주세요. 제 여분의 인생을.”
돌아오지 못할 세월의 강가에 흩어지는 포말 같은 그 말 한 마디, 혹시 환청(幻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녀석은 말했었다.
나는 어찌할까 망설였던, 녀석이 남긴 연서에 불을 댕겼다. 금방 메케한 냄새가 이슥한 공원에 번졌다. 나는 지금도 가끔 녀석의 곤고했던 정신에 위안이 되었을 한 여인을 상상해보곤 한다.
* 작가의 말 : 새해 첫 머리부터 사랑 얘기를 들추고 보니 내 자신이 진부해지는 것 같다. 순수해야할 사랑이 상품처럼 거래되는 요즈음이다. 플라토릭 러브를 꿈꾸었던 한 여자를 연모한 남성 수도자의 비극적 종말은, 아무리 허구라고 하더라도, 좀 안쓰럽다. 지나간 뒷등은 모두 다 그립고 아쉬운 것임으로.
* 약력 : 47년 부안 출생. 82년 <수필문학> 2회 추천완료. 84년 <월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 00년 백양촌 문학상(수필부문) 수상. 05년 전북예총상(문학부문)수상. 한국문협. 전북문협 회원. 원광대 교수(현). 월간문학> 수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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