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영(농협중앙회 상호금융총본부장)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내 의식속의 시간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60년대 중반쯤 상급학교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농촌은 매우 어려웠다. 몇 되의 쌀과 보리를 시장에 내야 삽과 괭이 등의 농기구를 구할 수 있었으며, 계란꾸러미라도 들고 가야 고무신이나 학습장을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얼마 안 되는 학교 등록금조차 기한 내에 납부하는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한, 농촌지역에는 제도권 금융 기관이 없다 보니, 농민들은 급히 돈이 필요하면 월 5부 이상의 고리 사채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고리 사채는 이를 갚기 위한 빈곤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가난의 굴레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말 그대로 식구라도 줄이기 위해 많은 농촌의 아들딸들이 남의집살이를 가야했고, 공장의 근로자로 떠나야 할 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 사실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여 후손들에게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 당시 전 국가적으로 근대화 사업과 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전국 각지에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중화학 공업을 강력 하게 추진했으며, 자조,자립,협동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농협은 그런 국가적 시책에 부응하여 1969년 7월 20일 전국의 150개 지역 농협에서 여수신의 신용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 농촌에 만연하고 있던 고리사채를 해소하고 농업인 스스로 자금의 잉여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상호금융이 시작된 것이다.
초창기 상호금융은 근면성실 내핍정신에 기반을 둔 새마을부녀회의 절미(節米)운동 등을 통하여 저축 증대 운동을 추진 했다. 마땅한 저축재원이 없었던 그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끼니때마다 한 두 숟가락의 쌀을 좀도리 쌀통에 모으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마을회관에 쌀통을 가져와 한데 모아 팔아 농협에 저축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농협의 상호금융 예수금이 40주년을 맞이한 현재 170조원을 넘었다. 국내 은행들과 비교해도 당당할 만큼 성장했다. 특히, 농촌지역의 고리사채 해소, 영농자금 지원 등 각종 정책자금 지원창구역할, 서민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 등을 병행하며 이룩한 성과라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경제 발전론자들이 생산성이 낮아 경쟁력이 없으며 마치 경제발전에 미운 오리 새끼쯤으로 여겼던 농업분야의 발전에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민들과 비교하면 농업인들은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도시에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다. 농업이 갖는 한계나 특수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혹 우리의 관심과 사랑, 지혜 그리고 노력이 부족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구에게나 정서적 이유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먹을거리 확보측면에서도
농업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협의 상호금융을 총괄하는 필자에게는 더욱 무거운 의미로 다가온다. 고향을 생각하며, 농협이 농업 생산의 종자 돈이 되고 내 고향 농촌을 회생시키는 불씨가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시 가다듬어 본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우리의 정다운 이웃, 농업인들이 함박웃음을 웃는 그 날을 기대하며….
/황의영(농협중앙회 상호금융총본부장)
▲ 황의영 본부장은 전북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재학중이다. 농협 본부 종합기획부 과장, 교육개혁단 단장, 안성교육원 원장, 제32대 본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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