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령포와 「세종실록지리지」
영월발전소에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중부, 영동고속도로를 타다가 원주에서 제천가는 국도를 거쳐 주촌 산길로 빠졌다. 시간 반은 족히 될 주촌의 산길에는 간간이 지나가는 차가 눈에 띌 뿐이었다. 친구와 찾은 곳이 청령포였다. 단종의 귀양지였던 바로 그곳이다. 그저 남강이라고 부른다고 사공이 일러주었던 그 강은 유턴을 하고 흐르며 삼면을 막아서고 있었고, 그 배면은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또 산이었다.
이런 첩첩산중에 화력발전소를 지을 생각을 한 걸 보면 식민주의자들이 새삼 섬뜩하다고 친구는 말했었다. 그런데 청령포에 이르러 단종이 귀양 살던 옛터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제일 먼저 든 생각도 비슷했다. 어떻게 여기에 이런 천연의 귀양지가 있는 줄을 알고 이곳으로 유배 보낼 생각을 했을까.
조선건국 이래, 조선 정부는 전국의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으로 각도(道)의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지리서는 물론 인문지리서이다. 세종대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부른다.)가 편찬되었고, 성종대에는 정치, 군사, 경제 위주로 되어 있는 「팔도지리지」의 문화 영역을 보완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단종이 유배된 때가 세조 2년이니까, 바로 이런 지리지의 편찬을 통하여 전국의 지역적 특성과 지형을 중앙조정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런 외지고 척박한 곳을 귀양지로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손자인 단종을 유배 보내는데 자신이 편찬을 명했던 그 지리지가 이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 지(志)와 지리지(地理志)
'지역의 생활에 대한 종합보고서'라고 정의할 수 있는 '지리지'의 연원은 오래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서(書)'란 분류를 통하여 '지(志)'의 내용을 담았다. 「춘추(春秋)」와 같은 편년체와 달리 왕조 단위로 편찬되었던 기전체(紀傳體) 역사는 사마천에서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사기」는, 그 본기(本紀)가 왕조의 골격이 되는 정치사라면, 열전(列傳)은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이다. 그리고 서, 곧 지(志)를 통해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각 분야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서든 지든 모두 기록한다는 뜻이다.
'지'는 선거지(選擧志·과거시험 같은 인재선발 제도)나 백관지(百官志·정치제도) 같은 제도사, 식화지(食貨志) 같은 경제사, 지리지 같은 풍속사, 예지(禮志)나 악지(樂志) 같은 각종 문화사, 형법지(刑法志) 같은 법제사, 예문지(藝文志) 같은 학술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즘 말로 분야사라고 이해하면 쉽다. 학문성과를 모은 사료를 예문지(藝文志)라고도 하고 경적지(經籍志)라고도 했던 것처럼 지의 하위분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지가 분야사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지리지'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통해서였다. 그는 사마천의 '서'를 '지'로 바꾸면서, 거기에 새로 '지리지' 항목을 두었다. 삼국시대에도 지리지가 편찬되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지 않고,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지리지만 현존한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도 수도였던 개경(開京·개성)에서부터 각 도나 현(縣)의 설치하거나 폐지하는 것을 다룬 지리지 3권이 수록되어 있다.
▲ 지리지, 제국(帝國)의 시선
그런데 여러 지 중에서도 지리지는 다른 분야사와는 조금 다른 함의를 갖는 편찬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리지는 풍속사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풍속사가 아니라, '지역' 또는 '지방'과 결합된 풍속사이자 생활사라는 점이다. 중국 제국 문명을 처음 완성한 한나라의 역사인 「한서」에서 지리지란 명칭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지리지라는 문명의 산물에는 제국의 시선이 담겨 있다. 즉, 어떤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관찰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중심에서 보는 주변, 중앙에서 보는 지방, 제국에서 보는 식민지 등과 같은 시선이 그것이다.
사이드(E. Said)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 현대사에서도 이런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가 전 세계를 상대로 식민지 경쟁에 독이 올라있던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침략하였다. 그리고 그 침략의 결과는 「이집트지(Description de l'Egypt)」라는 제국주의적 성과로 나타났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유럽인에게 완전히 개방하고 그들에게 면밀한 조사를 맡겼다. 역사가, 생물학자, 고고학자, 의사 등의 조직을 포괄했던 이집트협회는 나폴레옹 군대에 예속된 연구사단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점령과 거의 동시에 이집트협회에서 모임과 실험(요즘 '현지조사'라고 불리는 활동)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말하고 관찰하고 연구한 것 일체가 '기록되어야' 했으며, 실제로 그것은 「이집트지」라고 하는 명칭으로 간행되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고자 하는 기획과 시도 속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것은 1809년부터 1828년에 걸쳐 모두 23권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출판되었다. 「이집트지」는 규모나 집필자의 학문적 수준에서 볼 때 당시 유럽 최고의 작품이었다.(참고로, 이 책의 크기는 1㎡였다.)
이런 전통에서 19세기 문헌학자들은 인종, 심성, 성격, 기질 등의 '근본적 요인'으로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환원하였고, 동양은 범신론(汎神論), 정신성, 안정성, 항구성, 원시성 등의 측면이 강조되었다.
서양은 물질, 동양은 정신, 운운하는 습관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유럽이나 북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아시아', '중동' 등 지역 연구도 이러한 전통의 연장에 있다.
▲ 새로운 지리지를 찾는 첫 걸음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할 때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쳤다. 「조선왕국(朝鮮王國)」(1896)을 비롯한 「침략3서(侵略三書)」,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취락(朝鮮の聚落)」 등은 모두 식민통치를 위한 일람표였다. 일람표의 작성 목적은 물론 벤담(Bentham)식 원형감시시설(Panopticon·가운데 감시탑에서 모든 감옥을 통제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일람표는 통치를 위한 표상의 창출(조작)과, 통치를 위한 정보의 수집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편견은 바로 이들 조사와 조작을 통해 형성, 선전되어 유전된 것이다. 사대, 당쟁, 정체성 등 정치적인 담론부터 남존여비, 불결, 사기성, 미신 등 문화나 민족성에 대한 본질론까지. 동양인은 후진적, 퇴행적, 비문명적, 정체적 등의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며, 이런 딱지가 생물학적 결정론과 윤리적·정치적 교훈으로 구성되는 틀 속에서 관찰되었던 오리엔탈리즘,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지도 중앙정부에서 지방을 파악하는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그 작동 메커니즘은 제국 - 식민지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든 현대 한국이든, 같은 국민국가 안의 관계이기 때문에, 제국 - 식민지의 관계와는 달리, 중앙과 지방이 늘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고 상생공존의 여지가 큰 것은 사실이었지만, 조선 왕조의 성격이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이었기 때문에 항상 '중앙의 눈'이 지방을 말하는 방식이 우세하였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도 '중앙의 눈'을 내면화하여, 지방민이면서도 중앙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중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을 바로잡는 길은, 당연히 '중앙의 눈'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그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가 지리지를 재해석하는 역사학의 방법이다.
조선전기의 지리지는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때 보완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풍속, 물산이 바뀌자 조선후기에 다시 지리지를 편찬하는데, 이것이 영조 35년(1759)에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였다. 「여지도서」는 지방의 읍지(邑誌)를 모아서 재편찬한 것인데, 불행하게도 공식적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로 전해져왔다. 지방의 읍지라고 해도, 지방 수령이나 관찰사도 중앙에서 파견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지방민의 시각으로 작성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지도서」는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중앙의 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여지도서」가 누구나 볼 수 있는 한글본으로 다가왔다. 「여지도서」 번역본을 통해 쉽게 '중앙의 눈'을 해체하고, 지방이 주체가 되어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여지도서」처럼 지방자치시대에 지방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역사 자료들이 더 많은 관심과 번역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은지 주위를 돌아보면 더 좋겠다.
/오항녕(한국고전문화연구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