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장중한 맛 부족하지만 서체변화 감지 할 수 있어
1979년 4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충청북도 중원군 가전면 용전리 입석(立石) 부락 입구에서 하나의 고비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비가 서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북지역에도 있는데, 필자가 지난 2005년에 김제지역의 명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경의 입석산(立石山)에 송일중(宋日中)의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 탐방하였는데, 산 정상의 집채만한 거대한 자연석에 행서 필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탁본 전시한 적이 있다. 이곳의 지명도 그런 예이다. 학계에서는 발견된 비의 제액이 확실치 않으므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붙여 '중원고구려비'라 명명하였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 너비 55cm의 자연석을 다듬어 전면과 좌우측면에서 문자를 새긴 흔적이 보이는데 마모가 심하여 해독이 어렵다. 다만 高麗大王, 大使者, 大兄 등 고구려 관등이 보이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한 5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 더불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비의 발견 이후 비문을 해독하면서 입비의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비문 해독의 문제는 그 내용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해야 하고, 새로 밝혀지는 내용들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각자의 설들은 그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비설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전면부에 보이는 '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는 내용이었다. 12월 23일이 어느 해를 가리키며, 또 간지가 갑인일에 해당하는 때는 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러 설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 서기 480년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사처럼 논란이 많은 부분은 개인에 의한 단편적 연구에 의지하기보다는 애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5월에 高麗大王 上王公와 新羅 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라는 구절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엿볼 수 있고, 고구려가 신라를 '東夷'로 칭하면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에서는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5세기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돌의 형식으로 보아 아직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4면으로 다듬기는 하였지만 자연석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글씨는 질박한 고예풍의 필획을 느낄 수 있으나 글자의 우측이 올라간 우견서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자형이 해서의 결자 방식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광개토호태왕비보다 해서화된 느낌이 든다.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와 같은 장중한 맛은 부족하지만 서체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점제현신사비로부터 광개토호태왕비, 중원고구려비, 신라시대의 울진봉평비, 창녕진흥왕순수비에 이르기까지의 고대의 비들은 특정한 서체로 확정하기 모호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필획의 질박함과 결구의 소박함은 고졸미를 자아내어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전에도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를 운위한 적이 있지만 고대의 석각문자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형식을 매우 중시하는 후대의 비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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