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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5)부여궁남지출토 목간의 가치

자유분방한 필세, 백제문화 오롯이…강력한 국권중심 일정한 지역 분활통치

부여궁남지출토 목간(6세기) (desk@jjan.kr)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부여) 남쪽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궁남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정원으로서 그 축조가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선다. 궁남지의 발굴은 1990년 궁남지발굴조사단(단장 윤무병)에 의한 1차 조사와 국립부여박물관이 1991년에서 1993년에 걸쳐 2차 및 3차 조사를 실시하였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조사결과는 2007년 3월 「부여궁남지 발굴조사보고서(1~3차)」에 수록되었다.

 

1995년, 궁남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한 편의 목간은 곧바로 관련 학계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역사학계에서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백제시대의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로 인정되었고, 서예계에서는 백제시대 친필로서 서예사적 의미가 담긴 선명한 목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목간은 대체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나무를 평평하게 깎아 글씨를 쓴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기록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1차 자료이다. 특히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그 내용과 형식에서 특이한 점이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오늘날 1500여 년의 세월동안 간직해 온 생생한 필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음은 실로 안복이 아닐 수 없다. 발견 이후, 적외선 촬영을 통하여 보다 선명한 필획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해독도 이루어졌다. 모두 31자의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백제의 정치 및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다. 목간의 앞면에는 "서부(西部)의 후항(後巷)에 사는 사달(巳達)·사사(巳斯)라는 사람은 21세 이상의 사람……, 귀인(歸人) 중에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4명, 16세 이하인 2명이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에 가서 논 5형(形)을 개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이해를 위하여 중국의 사서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도성 내 민가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수서(隋書)」 백제전에도 "도성 내에 5부가 있고, 부에는 5항이 있는데 사인들이 거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에는 5부(部)가 5항(巷)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독된 글자 중에는 연령대를 뜻하는 글자로서 정(丁)·중(中)·소(小)가 있는데 「당령집유」에 의하면 "3세 이하를 황(黃), 16세 이하를 소(小), 20세 이하를 중(中), 21세 이상의 남자를 정(丁)이라 한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보이는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은 백제의 왕후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남제서」에는 동성왕 12년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또 중국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이 위기에 처하자 대륙에 장군을 파견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자 沙法名을 邁羅王, 贊首流를 ?中王, 解禮昆을 後, 木干那를 面中侯로 임명하였다는 기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껏 중국의 사서에만 전해오던 매라(邁羅)에 대한 기록이 백제의 목간에서 재확인된 것이다. 이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 자리한 소국이었다는 관념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대목이다. 백제는 강력한 국권을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을 분할통치하는 지방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관리도 매우 치밀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내용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서예적 측면에서 보면, 자체가 구속됨이 없는 활달함을 보이고 있어 그 필세가 자유분방하다. 자형이 평정하면서도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숙달된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묵의 사용이 일반에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형화된 석각문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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