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내용 보완 등 고대사 연구 기여…출토 사리장엄구, 역사학계 획기적인 정보 제공
최근 몇 년 사이에 백제시대의 사지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로 꼽히는 무녕왕릉 발굴에 이어 왕흥사지와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역사학계에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 백제시대 불교연구는 물론이고, 발굴된 유물 중에는 정사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명문들이 포함되어 있어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예사 연구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 있는 발굴이었다.
1995년 부여 능산리의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창왕'이라는 명문이 선명한 화감암 재질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이 출토되었는데 안에 봉안되었던 사리기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석조사리감의 양면에는 각각 10자씩 나누어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백제 창왕 13년 정해(567)에 창왕의 매형과 공주가 함께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간기를 가진 귀중한 유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조에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창왕은 곧 위덕왕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6년 5월 30일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위덕왕>
뒤이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3중구조 사리구(舍利具)를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청동제 사리함 안에 은제 사리병을 넣고, 다시 은제병 안에 작은 황금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함 겉면에는 명문이 있는데, 5자씩 6행에 걸쳐 모두 29자(제6행은 4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그런데 명문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도출되었다. 정확한 판독을 위해서는 우선 명문을 서체와 문자학적 입장에서 면밀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으며, 다음으로 판독된 석문을 정확하게 해독하는 일이다. 일차 공개한 석문은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며, 그를 토대로 번역하면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물이 공개된 후 亡자를 三으로 보아야 하고 葬자는 묻을'예'자로 보아야 한다거나, 立刹은 절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탑의 찰주(刹柱)를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이체자에 대한 논란도 그 중 하나이다. 과학적인 분석과 더불어 시대적 입장에서 치밀한 서체분석이 선행되어야만 정확한 석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의 2월 15일은 단순히 사리를 봉안한 날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그 날이 바로 부처님의 열반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역사적 의미는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또 2009년 1월 14일 백제 제30대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1호 익산미륵사지 석탑 가운데 서탑(西塔)의 기단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진신사리는 또 한번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사리기가 출토된 것은 2007년 왕흥사지 목탑터에 이어 두 번째이며, 유물 중에는 앞뒤면에 총 193자가 새겨진 금제사리봉안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그동안 전해오던 선화공주에 대한 일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굴된 유물들은 그 해 6월 27부터 7월 26일까지 미륵사지박물관에서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및 진신사리 특별전'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명문의 서체는 왕흥사지 출토 사리함과 비교하여 훨씬 정제된 체세를 보이고 있어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만 그것이 백제시대의 미감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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